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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 comics/글

뎀팀 - 붉은 모란

ㅁㅁㄹ 2020. 5. 5. 01:32


*리그에 대한 자작 설정이 있습니다*



벌써 데미안이 18살이라니. 걔가 얼마나 어렸는데, 난 아직도 데미가 성인이 된 게 믿기지 않는다니까? 딕이 조잘거리며 얘기를 꺼냈다. 모처럼 웨인저에 찾아온 딕은 곧 있을 데미안의 18살 생일파티를 위해 미리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 팀은 딕이 자신을 끌고 가는 바람에 같이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뭐, 같이 가는 김에 생일선물도 적당한 거 찾으면 나쁘지 않으니까. 그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딕의 말을 들어주면서 무난한 선물이 뭐가 있을지 둘러 보고 있었다. 왼쪽을 한번 보고 오른쪽을 한번 보고, 다시 왼쪽을 보며 전시물을 관찰하던 도중 팀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팀? 너 벌써 찾은 거야?"
"어... 그냥 보는 거야."

발걸음이 멈춘 자리로부터 5m 너머에 마네킹이 하나 서 있었다. 깔끔한 검은색 슈트에 청록빛 넥타이가 전시된 마네킹이었다. 그 가운데 팀의 눈길을 끈 건 넥타이었다. 넥타이의 오묘한 청록빛이 눈에 띄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가운데에 박힌 붉은 것들이 팀을 끌어당겼다. 넥타이 중앙에는 아주 작은 붉은 계열의 보석들이 모여 하나의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더 자세히 보니 청록빛의 단색 배경에는 청록색보다 조금 더 옅은 색의 선으로 이루어진 패턴이 새겨져 있었다. 보석들의 영롱한 반짝거림은 그 넥타이의 가치가 꽤 높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팀은 붉은 보석들이 무슨 문양을 그리는지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마네킹 앞으로 다가갔다.

그건 꽃이었다. 붉은 보석들로 이루어진, 어디선가 보았던 꽃. 모양새를 보아하니 얇은 꽃잎들이 겹겹이 모여 있으면서도 살짝 바깥으로 퍼진 모습이었다. 또한 멀리서 보았을 때 붉은 보석의 모양만 보였는데 꽃 한 송이 밑으로는 초록색 보석으로 만들어진 이파리와 줄기가 넥타이의 배경색인 청록빛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표현되어 있었다. 배경에는 미세한 은펄이 느껴지는 청록빛 선이 구불거리며 동양적인 패턴을 이루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단지 청록빛 배경과 붉은 문양만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여러 가지로 넥타이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조금 과한 감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넥타이를 이루는 요소 중 하나라도 빠지면 아쉬울 것 같았다. 원래 내 취향은 이렇게 화려한 게 아닌데 왜 이렇게 시선이 끌리지.

"엄청 화려하다. 너는 좀 심플한 거하고 다니지 않아?"
"맞아. 넥타이는 심플한 게 제일 무난해서 보통 그걸로 하고 다니는 편이야."
"음, 그럼 이건 선물용?"
"글쎄......"

팀은 고개를 좌우로 움직여 목 근육을 풀면서 넥타이를 계속 응시했다. 넥타이에 박힌 보석들은 고개를 기운 순간에도 그대로 제빛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걸 데미안 생일 선물로 준다고? 그 애가 과연 이걸 반길까. 너무 투머치한 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 너 이 꽃이 뭔지 알고 보러 간 거야?"
"굳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눈에 띄어서 간 거야."
"확실히 보석이 화려하긴 해. 아무래도 모란 같지?"
"모란 아니면 작약이겠지. 둘이 비슷해서 그림으로는 구분하기 힘든걸."

팀은 다시 넥타이 속 꽃을 쳐다보았다. 화려한 붉은 보석들로 이루어졌으나 장미처럼 화려하다기보단 단아하게 느껴지는 꽃.

"근데 왜 이 꽃이 뭔지 아냐고 물어본 거야?"
"음~ 만약에 모란이라면 꽃말이 되게 좋거든. 부귀, 영화라고 해. 모란은 중국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고 말이야. 데미안에게 잘 어울리지 않아?"
"음......"

넥타이 속 붉은 모란이 계속 팀에게 자길 보아달라고 애원하는 듯했다. 팀은 그 모란의 붉은빛을 바라보다가 딕에게 말했다.

"일단 이거 살래."
"생일용은 아니고?"
"사놓고 다른 것도 좀 구경하다가 더 괜찮은 거 있으면 그걸로 할래. 없으면 음, 고민해보고. 일단은 사고 싶어."
"그럼 그렇게 해. 여기 보니까 한정판이라고 적혀 있네. 지금 안 사면 나중에 가선 없겠다."
"그러면 나 계산하고 올게."
"그래 천천히 와. 난 구경하고 있을 테니까."

딕이 먼저 떠나고 팀은 마네킹 옆 진열장에 놓여있는 넥타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가락을 통해 느껴졌다. 이거 완전히 홀린 느낌인걸. 그러나 사겠다는 마음이 흔들린 건 아니기에 팀은 그 넥타이를 들어 올렸다.

그날 딕은 꽤 오랜 시간 끝에 데미안의 생일선물을 찾아냈다. 딕이 '데미안이 보면 만족하겠지?', 하고 말하며 웃으면서 집으로 돌아갈 때 팀은 딕의 말에 '그렇겠지', 답하며 손에 든 쇼핑백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넥타이 하나만이 들어있었다. 결국 팀은 다른 선물을 고르지 못했다. 그의 심미안과 데미안의 심미안에 부합할만한 선물이 안 보였기 때문이다. 데미안에게 주는 선물인데 왜 굳이 그의 심미안까지 충족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팀이 그래도 자기 눈이 있는데 그걸 무시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그러고 보니 팀은 결국 선물 못 샀네."
"응 그냥... 마음에 드는 게 없더라고."
"그 넥타이의 용도는 아직 안 정했고?"
"아마?"
"잘 생각해봐. 데미안의 선물을 생각하고 있다가 넥타이가 딱! 눈에 들어온 거잖아. 마음속에는 이미 네가 그 넥타이를 선물 감으로 정해두고 있는 거일 수도 있어. 그래서 그것보다 더 좋은 걸 못 찾은 거지."
"그런가. 그 말도 일단 고려해볼게."

딕과 팀은 도란도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웨인저까지 갔다. 저택에 도착해 딕이 차를 주차해놓고 시동을 껐다. 팀은 옆좌석에 놔둔 쇼핑백을 들고 차 밖으로 나왔다. 오늘따라 청량한 날씨가 느껴졌다. 부드러운 바람이 솔솔 불어와 쇼핑백을 든 팀의 손을 한번 감싸고 지나갔다. 날씨 한번 기가 막히게 좋네. 푸른 하늘에 적당한 온도. 그리고 정작 나와 딕은 이런 날씨에 밖이 아닌 쇼핑몰 센터를 다녀왔지만 말이지. 데미안의 선물이라... 딕의 말대로 넥타이가 괜히 내 눈에 들어온 게 아닌 걸까.

그들은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헤어졌다. 팀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지러운 책상 위 서류들을 옆으로 치우고 쇼핑백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서 곧장 침대를 향해 걸어가 풀썩 뒤로 누웠다. 높은 천장이 팀의 시야에 들어왔다. 천장을 가만히 쳐다보던 팀은 그 천장에 새 놓인 벽지 문양들의 개수를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42, ...45. 아, 그만하자."

슬슬 정신이 혼미해져 왔다. 지루함과 졸림이 팀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넥타이. 그 넥타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넥타이 속 붉은 모란꽃이 팀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진짜 홀린 거야. 안 그러면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없어. 귀신 들린 물건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홀리게 한다는데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요즘 귀신은 시즌 한정판 새 넥타이에 들러붙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뭐 귀신은 유행에 뒤처진다는 내 편견일 수도 있지만... 왜 생각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결국 팀은 침대에서 나왔다. 목적지는 쇼핑백이 올려진 책상 앞이었다. 그냥 꺼내자. 꺼내서 다시 한번 넥타이를 보자. 다시 개어서 넣는 건 잘하면 되겠지. 정 안 되면 알프레드를 부르면 되는 거고. 그는 알프레드가 들으면 '저를 이런 식으로 부려먹으려 하다니 조금 섭섭하군요 팀 도련님' 하며 말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쇼핑백에 손을 넣어 넥타이 보관 상자를 꺼냈다. 고급스러운 벨벳 상자의 뚜껑을 열자 넥타이에 박힌 작지만 아름다운 붉은 보석들이 반짝거리며 그를 반겨주었다. 팀은 넥타이를 들어 올렸다.

"......"

백화점에 다녀오는데 아무거나 입기는 그래서 그는 간단하게 흰 와이셔츠에 남색 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한번 넥타이를 와이셔츠의 넥카라 근처에 가져다 대어보았다. 그 자세 그대로 목을 숙여 밑을 내려다보니 흰 와이셔츠 가운데 화려하게 존재감을 빛내는 모란이 눈에 띄었다. 하얀 바탕에 청록색 영역이 만들어지고 그 녹음 사이에 피어난 붉은 꽃이 이질적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넥타이는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 내가 정말 데미안을 생각하다가... 이 넥타이를 데미안의 선물로 주고 싶어서, 결국 데미안이 생각나서 산 거란 말이야?

그러나 이 넥타이를 한 데미안의 모습을 상상해보고서야 팀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에게는 너무 화려해 낯설게 느껴지는 모란꽃이 데미안에게는 그것이 원래 자신의 것이었다는 마냥 찰떡같이 어울리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다 팀의 상상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의 분위기와 녹음이 물씬 느껴지는 홍채를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 넥타이는 데미안에게 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넥타이에 짙은 진녹색 정장 슈트와 흰 와이셔츠면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아니면 검은 와이셔츠도 나쁘진 않아... 헉. 내가 왜 데미안 코디를 생각하고 있지. 이제 그만하자. 넥타이나 조심히 개어서 다시 상자에 넣어야겠어.


그렇게 당일이 되었다. 데미안의 18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날 웨인저에는 소소한 깜짝 파티가 열렸다. 미리 존에게 부탁해 온종일 데미안을 저택에 돌아오지 못하게 해놓고서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파티 준비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사실 깜짝 파티라고 해서 거창한 건 없었다. 그냥 가족끼리만 모여 데미안을 축하해주는 것뿐이었다. 다만 제이슨이 올지 안 올지는 잘 모르는 상태였는데, 집에 들르라고 연락은 했지만 가겠다는 답장이 안 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지 않을까? 안 오면... 딕이 아크로바틱 들고 끝까지 따라간다고 말했던 거 같은데 말이지.

준비가 다 되었을 때 시계의 시침은 7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이슨이 방금 막 도착해서 이제 당사자만 오면 곧바로 가족끼리의 작지만 정성 어린 생일 축하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팀은 옆에서 데미안을 놀라게 해주고 싶어 하는 딕을 보니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존이 어떻게 데미안이랑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 녀석은 이미 지금쯤 예측 다 하고 집에 갈 시간이 될 때까지 장단 맞춰주고 있을 법도 했기 때문이었다. 슬슬 존이 데미안 데리고 올 때가 됐는데.

그때 현관에서 존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오늘 꽤 괜찮았지? 걔가 너한테 준 선물 잘 보관해둬, 그거 진짜 웃기더라. 그럼 남은 생일도 잘 지내고 나중에 보자 데미안!' 아하, 애들끼리 모여서 데미안 생일 축하를 해줬나 보네. 존의 말에 데미안이 간단히 대답하는 소리도 들렸다. 문손잡이가 돌아가면서 열리는 그 순간,

"서프라이즈~ 생일 축하해 데미!"

딕이 폭죽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폭죽의 다채로운 종이 잔해물들이 공중에서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일부는 데미안의 머리에 안착했다.

"딕."
"응?"
"귀 아프니까 다음부턴 옆에서 폭죽 터트리지 마."

데미안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볍게 흔들어 위에 붙은 잔해물들을 털어냈다. 그 말을 들은 딕이 다급히 덧붙였다.

"미안 내가 너무 가까웠지? 그래도 우리 데미 드디어 성인이 되는 날인데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아서... 우리가 널 위해 파티를 준비했어!"
"파티? 아까도 실컷 하고 왔는데."
"친구들의 생파랑 가족의 생파랑 느낌이 다르지. 뭐 먹고 온 거 있어?"
"3시 이후부턴 안 먹었어."
"그럼 저녁부터 먹자, 어때? 알프레드가 아주 최선을 다했어."
"좋아 가자."

팀은 딕과 데미안의 대화를 들으며 참 딕도 딕 답다고 생각했다. 18살, 성인이 되는 생일을 형제들 모두 모여 축하해주는 건 데미안이 처음이었다. 딕은 그때는 형제 없이 혼자였고 제이슨은... 넘어가자. 팀 본인은 그때 여러 사건이 많아서 간단히 생일 축하만 하고 이번처럼 본격 준비하지는 않았었다. 팀의 18살 생일 때 딕은 당시에 일이 있어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전화로만 축하해주었는데 이때 딕이 정말 아쉬워했던 기억이 났다. 결국 그 경험을 바탕 삼아 막내 데미안의 18살 생일은 안 놓치게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날 저녁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가족 모두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은 마치 평범한 가족 간의 저녁 식사 같았다. 본래라면 이런 풍경이 익숙해야 정상이지만 그들이 다 모여서 언쟁하지 않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식사하는 건 평범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팀은 데미안과 브루스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름 기분이 좋은 듯 옅게 웃으며 대화하는 데미안이 갑자기 낯설게 다가왔다. 왜? 모르겠다. 그냥 이 상황 자체가 낯선가 봐. 그는 다시 식탁으로 시선을 내리며 식사를 이어갔다.

"팀."
"왜 제이슨."
"뭘 그렇게 열심히 봐?"
"나 너 안 봤는데?"
"나 말고."

뜬금없는 제이슨의 말에 팀은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 테이블에 앉아있는 그를 보았다. 제이슨은 입꼬리 한쪽을 올려 웃었다. 그러고는 눈을 찡긋거리는 것이 아닌가. 뭐야, 왜 저래?

"네 눈빛에서 다 알아챘어. 이 형은 다 알아요 알아."
"뭔데 제이슨?"
"아무것도 아니야 딕. 그냥 팀과 나만의 비밀."
"그 말 틀렸어, 너만의 비밀이겠지. 난 뭘 뜻하는지 모르겠거든?"

제이슨이 허어,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자 팀은 그 눈빛을 무시하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그때 데미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레이크."
"왜."
"너... 아니야. 그보다 사람이 말을 걸면 눈을 쳐다보는 게 예의지 않나?"
"오 미안 데미안."

데미안의 지적에 팀은 전혀 미안하지 않다는 어조로 사과를 하고 시선을 올려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두 눈이 마주치고 데미안이 말을 꺼냈다.

"됐어. 그냥 식사나 마저 이어 해라."
"뭐?"
"쯧, 아무것도 아냐."

뭐야 진짜. 낯설게 느껴졌다는 건 취소다. 그냥 평소의 데미안이야.

"......"

생일이니까 참는다. 팀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고 이어 식사를 계속했다. 알프레드가 오늘 정말 힘을 많이 쓰신 거 같아. 평소에도 맛있었지만, 오늘은 더욱더 맛있는걸.

평온했던 저녁 식사가 끝이 났다. 딕은 이제 선물을 주는 시간이라며 가족 모두를 이끌고 TV룸으로 향했다. 종종 영화를 보던 이 방은 언제 단장하였는지 여러 가지 소품이 추가되어 이전보다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저 큰 소파에 모두가 앉아 영화를 보는 건가? 이번 생일 파티의 주도자는 딕이었고 팀은 간간이 도와주기만 했기에 딕의 계획을 다 알지는 못했다. 팀의 예상이 맞았는지 딕은 가족들에게 이제 무비 타임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전에 선물 전달 시간이 있겠습니다~"
"뭐야 이렇게 공개적으로 선물을 전달한다고?"
"더 화목하고 좋은데 왜? 그리고 어차피 포장되어 있잖아. 설마 제이슨 너 이상한 거 주려고 했던 거야?"
"아니 뭐... 그건 아니지만."

딕의 반박에 달리 할 말이 없던 제이슨은 주머니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래도 선물이라고 포장까지 마쳤는지 무슨 내용물이 들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

제이슨이 데미안에게 선물을 건넸다. 손바닥에 다 들어오는 작은 상자였다. 데미안은 그걸 잡고 흔들어보았지만, 상자 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가 곧장 포장을 꺼내려고 하자 제이슨이 손바닥을 들며 데미안을 말렸다.

"워워 나중에 뜯으라고."
"뭔데?"
"그냥 좋은 거야."
"수상한걸. 뜯었더니 폭탄이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내 신뢰도가 그 정도밖에 안 돼?"
"그걸 이제 알았냐 토드."

그래도 제이슨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는지 데미안은 차분히 상자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다음은 딕이 선물을 꺼내어 데미안에게 건네주었다.

"나도 비밀이야, 이따 방에서 뜯어봐."
"알았어."

화기애애한 딕과 좋게 그의 말을 받아들인 데미안을 보며 옆에서 제이슨이 괜히 온 거 같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제이슨... 그래도 네 전적이 있잖아. 나도 그 선물이 뭔지 조금 불안할 정도인걸.

이제 팀의 차례였다. 팀은 백화점에서 샀을 때 주었던 쇼핑백까지 그대로 데미안에게 건넸다. 데미안은 눈썹을 까닥거리더니 쇼핑백 안에 손을 넣어 벨벳 상자를 꺼냈다. 그가 이게 뭐지 라는 눈빛으로 팀을 쳐다보길래 답했다.

"난 지금 열어봐도 상관없어."
"그래 데미! 열어봐."
"딕 넌 뭔지 아는 거야?"
"같이 사러 갔었거든."
"나 빼놓고 언제?"
"제이슨 넌 불러도 안 오기 일쑤면서 왜 그래."
"하 용케 '생일파티'에는 불렀구만?"

또 시작이다. 팀은 제이슨에게 그만 말하라는 눈빛으로 노려 보았다가 다시 데미안을 보았다.

"그래서 지금 뜯을 거야?"
"아니. 그냥 이따 한 번에 뜯지 뭐."
"좋아 그럼 이제 브루스 차례네요."

팀이 브루스에게 차례를 넘기면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사이에 데미안은 넥타이 상자를 딕과 제이슨의 선물상자 옆에 놔두었다. 크기와 포장 모두 각각 다른 세 상자에 어떤 내용물이 숨어있을지 조금은 궁금해졌지만 팀은 나중에 데미안이 선물을 사용하면서 어련히 밝혀지겠지, 란 생각으로 호기심을 눌렀다.

"데미안,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한다. 이건 네게 주는 선물이란다. 지금 열어보렴."
"예 아버지."

상자 크기가 아까 제이슨 만큼 작은데? 그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는지 딕이 말하였다.

"브루스도 제이슨이랑 똑같은 선물 준비한 거 아니에요?"
"설마 그럴 리가. 절대 아닐걸."
"제이 넌 진짜 뭘 준비한 거야?"
"난 그냥 저 녀석에게 좋은 거 준비해줬다니까?"
"둘 다 그만해."

보다 못한 팀이 둘에게 말했다. 데미안이 상자의 겉 포장을 뜯고 뚜껑을 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열쇠였다. 무슨 열쇠?

"이건..."
"네 전용 배트모빌의 열쇠지."
"아버지, 정말 감사해요."
"와 진짜로?"
"오."
"이제 로-빈 오토바이 탈출이네?"
"그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토드."

데미안은 상자 안의 열쇠를 조심스럽게 꺼내어 손바닥에 올려놓고 잠시 응시하다가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입에 미소를 머금고 데미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데미안은 배트모빌 열쇠를 올려놓은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아버지."

브루스는 데미안의 진심 어린 감사에 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들의 이런 모습은 평소 보기 힘든 광경이었고 이는 그를 더욱 기쁘게 만들었다.

"네가 기뻐하니 좋구나. 이제 무비 타임을 즐겨볼까?"
"네 좋아요."
"내가 데미 취향에 맞춰서 많이 조사했으니까 재밌게 즐기면 좋을 거 같아!"
"수고했어 딕."
"헉. 데미... 천만에."

데미안의 생일파티는 그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영화를 보며 중간에 서로 범인을 추측하는 바람에 집중이 안 되었지만 말이다.

밤이 깊어졌다. 그날 밤은 로빈의 생일을 기념하고자 레드로빈과 레드후드, 배트맨, 생일의 주인공 로빈이 빠졌기 때문에 고담의 다른 자경단만이 순찰을 하였다. 블러드헤이븐은 뭐, 나이트윙이 매일 같이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전직 세 번째 로빈, 현 레드로빈 팀은 고담의 밤하늘을 등지고 도시를 내려다보는 대신에 웨인 저택의 통유리 창문을 통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영화를 다 보고 자잘한 토크타임을 보냈다가 내일을 위해 이만 자기로 하고 헤어진 후 팀은 자신의 방으로 곧장 향했었다. 이 통유리창이 엄청 커 보였을 때도 있었는데 말이야. 물론 지금도 크긴 하지만 이전만큼 압도당하는 느낌은 아니지.

하늘에는 별빛이 드문드문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초승달은 그림자에 의해 가려진 그 조그만 면적 사이로도 강한 달빛을 발산해 검은 하늘 사이에 갈라진 틈새가 더욱 선명하게 와 닿았다. 넋 놓고 바라보면 10분이 훌쩍 지나갈 것만 같은 풍경이 팀의 시야를 떠나지 않았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팀이 뒤를 돌아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 시간에 누구지. 딕인가? 팀은 문 쪽으로 가 손잡이를 돌리며 동시에 물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문을 열어보니 상대는 데미안이었다. 아직 옷을 갈아입지는 않았는지 목덜미 부근 단추 두어 개를 풀은 와이셔츠와 검은 슬랙스 차림이 눈에 띄었다. 손에는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는데 팀 자신이 주었던 그 선물 봉투였다. 저걸 가지고 왔다고?

"너, 그 선물 말이야."
"지금 열어보고 온 거야? 음, 오래 걸릴 사안 같으면 일단 안에 들어와."

팀의 말에 데미안은 말없이 조금 고민하는 듯싶더니 성큼 그의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철컥, 팀은 문을 닫고 돌아왔다. 금세 데미안은 그의 방을 가로질러 통유리창 쪽에 가 있었다. 팀이 그곳으로 향하자 그는 창문 너머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팀에게 옮겼다. 뭔가 불만이 있어 보이는 표정은 아닌걸.

"그래서 내 선물이 왜? 맘에 안 들어서 환불이라도 하고 싶어?"
"넌 왜... 아니다."

데미안은 순간 눈썹을 찌푸렸다가 재빠르게 다시 본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을 팀은 포착하였으나 내색하지 않고 잠자코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이어 말했다.

"선물이 맘에 들어서 온 건 아니고, 그냥 간단히 묻고 싶어서 온 거였는데."
"물어봐."
"이 넥타이. 무슨 꽃이야?"
"...진심이야?"

팀은 데미안의 말을 듣자마자 미세하게 갖고 있던 긴장감이 갑자기 풀리면서 그만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본심을 툭 내던졌다. 말하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까칠하게 대답했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었다. 데미안은 팀의 말에 아무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 진지해 보이는 그 얼굴에 팀은 그 모습을 못 본 척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꽃은 모란이야. 됐지?"
"붉은 모란이라. 난 네가 나한테 잘못 준 줄 알았는데 정말 모란이었군."
"모란이 왜?"
"......"

데미안은 잠시 팀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빈손으로 가방 안 속 넥타이 보관 상자를 꺼내 열고 넥타이를 들었다. 언제 봐도 화려하면서 정적인 미가 돋보이는 붉은 보석의 모란꽃이 팀의 눈에 들어왔다.

"넥타이 영수증 줄까? 나도 그 넥타이에 대해서 엄청 잘 알거나 하진 않아."
"아니 영수증은 필요 없어."
"그럼 왜?"

데미안은 이번에도 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넥타이의 꽃이 팀을 등지고 자신을 향하도록 돌린 후 손을 올렸을 뿐이었다. 지금, 뭐야? 내 목에다가 넥타이 맨 모습을 어림짐작하는 거야? 팀은 자신의 방에 데미안이 찾아온 순간부터 모든 게 이해되지 않았다. 뭐 하자는 거지 진짜. 내가 너무 삐딱하게 생각하는 걸까? 근데 정말 이해 가지 않는 걸 어떡해. 왜 왔냐고 물었는데 대답도 안 하고. 생일이니까 참는다, 12시가 지나는 순간 방에서 쫒아내 버릴 거야.

"드레이크."
"어."
"넥타이 매줘."
"뭐?"
"넥타이, 매달라고."

잘못 들은 거 아니지? 팀이 데미안을 말없이 쳐다보자 그가 덧붙였다.

"아직까진 내 생일인 거 알지?"
"하아, 그래. 주인공 생일이니 해드려야지."
"여기 넥타이."
"그래. 그전에 단추 정도는 네가 잠그지 그래."

팀이 귀찮다는 듯이 느릿하게 넥타이를 데미안의 손에서 가지고 오는 사이 데미안이 속삭이듯 대답했다.

"단추를 직접 잠갔으면... 넥타이도 내가 매지 않았을까."

마치 귓가에 울리는 듯해 팀은 고개를 퍼뜩 들었지만 그는 몸을 조금이라도 앞으로 굽히고 있지 않았다. 내 귀가 방금 이상했나...?

"아 그래서 단추도 직접 잠가 달라?"
"아직 11시 50분이야 드레이크."
"좋아, 10분 후에 보자고."

팀은 대놓고 투덜대며 넥타이를 팔에 걸치고 두 손을 데미안의 와이셔츠를 향해 뻗었다. 손을 쫙 펴야지 겨우 닿는 거리였다. 너무 먼 거 같은데... 팀이 자연스럽게 한 걸음을 내디디고서 다시 단추를 향해 손을 뻗으니 자세가 이전보다는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

또한, 고작 한 걸음이 이렇게 거리 차이가 났는지도 알게 되었다. 굳이 한밤중에 찾아와서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넥타이에 이어 단추도 잠가 달라고 부탁한 것도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해. ......진짜 이상한걸.

"손이 좀 느린 거 같은데?"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시지."

사실 손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마음이 계속 들기 시작하니 모든 게 다 의식되어버리는 걸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와이셔츠 단추를 잠그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데미안 가슴 쪽에 손을 대게 되는데 대체 왜 흉식호흡을 해서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내가 느껴야 하냐고. 애꿎은 마음에 팀은 복식호흡을 하지 않는 데미안을 속으로 탓하며 고작 단추 2개 가지고 10초를 넘게 사투를 벌였다. 최대한 살갗에 닿지 않게 조심스럽게 단추를 잠갔던 탓이었다. 이거 가지고 왜 이러지. 정신 차리자 팀. 빨리 넥타이 매주고 데미안 쫓아내야지, 안 그래? 팀은 곧바로 데미안에게서 손을 뗐다. 그의 팔목에 넥타이를 걸어두었던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조심해야지."

갑자기 팔목에 느껴지는 압력에 그는 흠칫 했다. 데미안이 팀의 팔에서 흘러내리며 떨어지려는 넥타이를 순간 손아귀로 잡았는데 잡다 보니 그의 팔목도 같이 잡혀버렸던 탓이었다.

"어, 아 고마워."
"선물 받은 넥타인데 바닥에 떨어뜨리고 싶진 않아서 말이야."
"그래 아주 조심할게."

팀이 '아주'에 강세를 조금 넣어 말하는 사이에 데미안은 팀의 팔에서 손을 떼고 잡은 넥타이를 다시 그에게 건네주었다. 단추도 다 잠갔으니 이제 넥타이만 매어주면 되었다. 팀은 넥타이를 손에 잡고 잠시 문양을 바라보았다. 청록빛 바탕 속 붉은 모란은 여전히 팀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맞아, 그러고 보니 이 넥타이 지금 내가 매주면 넥타이를 한 쟤 모습을 직접 보겠네. 음... 자꾸 의식하지 말자.

천천히 손을 다시 그의 몸을 향해 뻗었다. 새삼 데미안이 많이 자랐다는 게 느껴졌다. 언제부터 내 키를 넘었더라. 팀의 머릿속이 온갖 생각들로 가득 찼지만 손은 넥타이를 들고 착실히 데미안의 목 근처까지 다가갔다. 생각해보니 남에게 넥타이를 매준 적이 거의 없던 거 같은데.

"고개 좀 숙여봐."
"어."

데미안이 고개를 숙이자 팀은 들고 있던 넥타이를 그의 목에 걸쳤다. 목에 건 넥타이를 손으로 스르르 잡아 내리며 대검과 소검의 위치를 잡고 있자 데미안이 다시 고개를 올렸다. 엄지와 검지 사이로 넥타이가 위로 올라가는 것이 느껴져 팀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올려 데미안을 순간 쳐다보았다. 시선을 밑으로 내리고 있던 데미안과 시선을 위로 올린 팀의 눈이 마주쳤다.

"아직 올리면 안 됐나?"
"아니... 상관없어."

빨리 묶어주고 방에서 쫓아내자. 다시 고개를 내린 팀은 양손에 잡은 대검과 소검을 크로스한 후 생긴 삼각 틈에 대검을 넣어 돌려 매듭을 하나 지었다. 그다음 매듭도 곧장 만들어 넥타이의 기본이 되는 삼각형을 만들었다.

"윈저노트?"
"응."

계속 보고 있었던 건가. 팀은 시선을 더욱 넥타이에 고정하고서 이어서 대검을 잡아 옆으로 돌리며 삼각형을 덮고 위로 올렸다가 아까 덮은 삼각형 밑 틈으로 넣어 내렸다. 다 됐다, 모양 잡고 당기기만 하면 끝이었다. 팀이 넥타이를 당길 때마다 넥타이 표면의 보석들이 천장의 불빛을 반사하며 찬란히 반짝였다. 화려하긴 정말 화려하다. 팀은 데미안이 숨을 못 쉴 정도로 넥타이를 꽉 당기고서 마무리로 점잖게 위치 조정을 한 후 손을 떼고서 곧장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
"......"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렸다. 넥타이의 청록색과 데미안의 녹빛을 띤 짙은 벽안이 매치되고 붉은 꽃은 더 눈에 튀었지만 이상하게도 전체적으로 보면 모난 곳이 없어 보였다. 생각보다 모란에 시선이 가기보단 넥타이 배경의 청록색과 그와 비슷한 그의 홍채가 돋보였다. 팀은 아무 말 없이 넥타이와 데미안의 눈을 번갈아 바라봤다.

"잘 맸네."
"못 맬 줄 알았어?"
"그건 아니지만."

데미안이 손으로 넥타이를 매만지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뭐 불만이라도 있나?

"그럼... 이제 다 된 거지? 이만 나가줄래?"

팀은 아직 12에 도착하지 않은 분침을 의식하며 말했다. 나가겠지? 제발 나가줘.

"왜 윈저노트로 했지?"

그게 왜 궁금한 거야.

"그냥 넥타이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게 윈저니까."
"하프로 하면 더 빨리 맬 수 있었을 텐데."
"그야 그렇긴 한데..."

뭐가 문제인 거야? 설마 하프로 다시 매주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팀은 이 상황들이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괜히 넥타이를 줬나 봐. 아니, 어쩌면 그날 백화점에서 정말로 홀렸던 거야. 모란의 붉은 보석이 사실은 저주받은 보석 같은 사연이 있었던 거지. 그게 남을 홀리게 만들었고 하필 그날 지나가다가 내가 당첨된 거야.

"...드레이크?"
"아, 음, 이 넥타이는 넥타이에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슬림하진 않잖아. 하프 윈저노트는 폭이 좁을수록 더 잘 어울리고 세련된 미가 보이는데 이 넥타이하고는 물론 하면 잘 나오겠지만, 아무튼 좀 더 정석적이고 또 하이라이트인 모란과 무게감이 균형 있는 윈저노트가 더 잘 어울릴 거 같아서. 그래서 윈저로 한 거야."

상당히 긴 말이었지만 요점은 이 넥타이는 하프보단 윈저가 더 잘 어울릴 거 같아서 윈저로 했다는 거였다. 팀은 자신이 말하면서 동시에 뭘 이렇게 설명하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끝까지 마무리했다. 좋아,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설명했는데 여기서 또 질문이 들어온다면 그땐 생일이고 뭐고 그냥 쫓아내는 거야.

"거울 있어?"
"네 방에 있겠지."
"보고 갈래."
"데미안,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니?"
"최근에는 그다지."
"...휴우. 거울 저쪽에 있어."

뒷목 땅겨. 팀은 왼손을 들어 뒷목을 덮고 고개를 위로 올렸다. 이쯤 되니 데미안이 일부러 자신을 물 먹이려고 진득하게 붙어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귀찮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내 성질 건드리고서 막상 화내면 생일날 뭐라 했다고 빚을 지워두려고 하는 거지. 그렇게 음모론을 하나 뚝딱 세우자 갑자기 데미안의 행적에 대한 모든 것이 수상해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식사 시간에도 잠깐 보자고 말하려 했다고 했잖아. 하지만 선물 때문에 어차피 나한테 올 거니까 안 말한 거라고 했었고, 근데 딕이 공개 선물 증정 시간을 만드는 바람에 따로 선물을 전해주지 않아도 되었고 그래서 선물을 주기 위한 개인적인 만남 역시 만들어지지 않았어. 그래서 지금 넥타이를 핑계로 날 찾아온 건가? 그럼 이제 본래 목적을 드러내려는 건가?

"뭔 생각을,"
"아 깜짝이야. 발소리 좀 내고 다녀."
"......"
"그래서 거울 보고 왔어? 어때, 다시 환불할 정도는 아니지?"
"...후."

왜 네가 한숨을 쉬고 그래. 팀이 팔짱을 끼고 데미안을 쳐다보자 그가 이어 말했다.

"모란은."
"모란이 왜, 그래 이어 말해봐."
"...붉은 모란은 내게 의미 있었던 꽃이야."

......어.

"무슨 의미?"
"그냥, 어릴 적 리그에 있을 때 내 방에는 붉은 모란이 새겨진 것들이 은근히 있었어."
"리그랑 관련 있는 거야? 고작 꽃이잖아."
"예로부터 모란은 왕에게 어울리는 꽃으로 사용되었지. 그 상징은 리그에서도 쓰였어. 부귀, 영화, 왕자의 품격... 후계자에게 어울리는 꽃으로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보지 못한 건 당연해. 넌 후계자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네가 이곳에 온 후로 모란은 더는 네 상징이 아니었겠네."
"그래. 나온 후 그 꽃을 일부러 안 보기도 하고 그랬지. 꽃 자체는 문제없다만 그건 나에게 옛 위치를 생각나게 했으니까. 옛날보단 현재 지금의 위치가 더 중요했고."

팀은 데미안이 잠시 그의 목에 매어진 넥타이의 중앙을 검지손가락으로 잡아 살짝 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무튼 그래서 붉은 모란을 본 건 오랜만이라 혹시 해서 물어본 거야. 네가 상징을 알고 나한테 준 건지도 궁금했고."
"꽃말이랑 그 꽃이 가지는 일반적인 배경은 알았지만... 네게 그런 의미가 있는진 몰랐어."
"그런 것 같더라."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분간이 안 갔다. 모란이 여러 가지로 자꾸 걸리네. 리그에 있던 시절을 생각나게 하고 후계자였던 위치를 생각나게 하는 건 좋지 않은 거 아닌가. 그렇지만, 지금 데미안이 짓고 있는 표정은 기분 나빠 보이지 않는걸. 오히려 살짝... 웃고 있어.

"네가 내 맘에 드는 선물을 줄 때도 있다니 시간이 참 흐르긴 했네."
"뭐?"

잠시 귀를 의심했지만 데미안은 생각할 틈 없이 이어 말했다.

"잘 사용하지."
"...그래."

생각해보니 자신이 너무 깊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정말로 왜 이런 넥타이를 줬는지 궁금해서 찾아온 거일 수도 있지. 그리고 온 김에 넥타이를 매주라고 나한테 부탁할 수도 있고 말이야... 아니. 넥타이를 매주라고 한 건 여전히 이상한 것 같아. 그래도 이제 끝난 거지? 팀은 데미안을 뚱하니 쳐다보았다. 너 이제 안 가? 하는 눈빛을 숨기지 않고 그에게 드러내자 데미안이 그런 팀의 생각을 느낀 것인지 모르겠지만 드디어 그가 원하는 말을 꺼냈다.

"이만 갈게."
"좋아 잘 가. 좋은 밤 보내고."
​"너도."
"어... 너도."

팀은 순순히 인사하는 데미안의 태도가 낯설었다. 왜 이렇게... 상냥하지? 아니 이건 상냥한 건 아니라 그냥 정상적인 반응인 건데 데미안이 저러니까 뭔가 느낌이 색다르네. 생각해보니까 목소리 톤이 항상 그랬듯이 딱딱한 톤이 아니라 조금 더 무른 느낌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
"......?"​
​​
팀은 데미안이 자신을 잠깐 응시하다가 이내 말없이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데미안이 문을 열고 한 발짝 앞으로 내딛어 팀의 방을 나서고서 문을 닫기 위해 몸을 돌릴 때 팀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손을 흔들어야 할 것 같은 타이밍이라 가볍게 왼손을 들어 두어 번 흔들자 데미안은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문을 방 쪽으로 밀어 넣었고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

뭔가 많은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느낌이었다. 살다 살다 데미안 넥타이를 매주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팀은 왼손으로 턱 가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그래서 데미안이 내게 찾아온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단순히 그 붉은 모란의 의미를 내가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온 걸까? 모란, 붉은 모란. 비록 흔하진 않지만 어디선가 보았던 붉은 꽃. 이미 내 손을 떠난 선물이고 이미 지나간, 그렇게 딱히 신경 쓸 상황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이 꽃을......

......

......졸린걸. 그 애도 납득하고 갔는데 내가 더 생각해보았자 뭐가 달라지겠어. 이만 자자.

팀은 무언가의 기시감을 잊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데미안은 곧장 전신거울 앞으로 향했다. 표면에 새겨진 그림 자체는 단아하지만, 보석 하나하나가 눈부시게 빛나 화려해 보이는 넥타이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 케이스를 열고 넥타이를 보았을 때는 이게 뭔가 싶었다. 그 녀석 취향은 이게 아닐 텐데. 그렇다고 내 취향이냐 하기엔 그것도 아니었다. 일단 꺼내 봐야지 싶어서 넥타이를 케이스 밖으로 꺼내 들어 그림을 보자 그는 한동안 미동도 없이 그 꽃을 응시하였다. 마치 피로 물든 것같이 붉은 모란이 데미안을 환영하고 있었다. 어릴 적 많이 보았던 꽃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붉게 물든 모란이 떠올랐다.

그다음에 든 생각은 이걸 자신에게 준 팀이었다. 의도한 건가? 아니면 그냥 우연으로? 자기 취향도 아닌 것을, 그렇다고 내 취향도 아닌 것을? ...... 데미안은 넥타이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보석 하나하나가 손가락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느껴지는 촉감은 차갑고 딱딱했다. 박혀있는 보석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다.

뭐, 의도가 궁금하다면 물어보면 되겠지.

그러한 가벼운 생각으로 팀에게 찾아갔지만, 막상 곧바로 물어보려니 이상하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돌려서 무슨 꽃인지 물어보자 곧바로 모란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 뒤에 나오는 반응을 보아선 적어도 의도해서 보낸 건 아닌 것 같았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되었는데. 데미안은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런 것일까, 왜 나는 그 녀석이 넥타이 맨 모습을 짐작해보았을까. 왜 나는 그냥 뒤돌아 방을 나오지 않았을까.

"드레이크."

그건 단순 변덕이었다. 충족되지 않는 마음에 제멋대로 내뱉은 발언이었다.

"넥타이 매줘."

뭐, 저 녀석이 넥타이 시중드는 모습을 보면 좀 나아지려나.

평소라면 강하게 반발했을 녀석이 순순히 자신의 말을 드는 모습을 보는 건 만족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지. 그 꽃 때문에 이러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닌데.

그래서였을까, 단추 정돈 자기가 잠그라는 말에 괜히 심술부린 건. 데미안은 솔직히 이건 정말로 안 해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손가락이 와이셔츠 단추를 잡으려다가 아주 살짝 몸을 스쳐 지나갔을 때 제 몸보다 서늘하여 차갑다고 느끼고서 데미안은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3초면 끝날 단추 잠그기가 10초나 흘렀다는 걸 알고 데미안은 더욱 이상함을 느꼈다. 어쩌면 당황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드레이크... 몸이 안 좋나? 손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는데 저래서야 넥타이도 제대로 매겠어? 저 봐라, 자기 팔에 넥타이가 걸린 걸 까먹고 곧바로 팔을 내리다니. 그는 흘러내리는 넥타이를 잡기 위해 팀의 팔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랐다는 게 경직된 팔을 통해 느껴졌다. 조금, 강하게 잡았나. 아니지 팔이 메마른 탓 아니야? 요즘 근력운동을 소홀히 하는 모양인데 나중에 발목 잡히지 않도록 훈련장에 던져놔야겠어.

어찌 되었든 넥타이를 매주기 위해 팀은 다시 한번 데미안에게 다가왔다. 넥타이를 목에 걸기 위해 고개를 숙이라는 말에 데미안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자 자신의 머리 밑에 있는 팀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려 가다가 목덜미를 다 덮지 못하고 끝나 하얀 목이 드러나 있었다. 왠지 손을 들어 목을 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피부를 가리고 싶었다. 아니야, 내가 왜 드레이크 녀석의 목을 만져. 데미안은 더는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올렸다. 그러자 팀도 따라서 고개를 올려 데미안을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푸른 눈이 데미안에게 왜 맘대로 고개를 올리냐고 묻는 것 같았다.

"아직 올리면 안 됐나?"
"아니... 상관없어."

팀은 다시 고개를 내렸다. 고개를 올린 데미안은 힐끗 밑을 내려다보았다. 제 밑에서 넥타이에 시선을 뗄 줄 모르는 팀과 이리저리 넥타이를 매기 위해 움직이면서 빛을 발산하는 붉은 알갱이들이 보였다. 더는 팀의 뒷목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건 또 이것대로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의 둥근 이마가 너무 앞에서 보이는 거 아닌가. 데미안은 밑으로 내리깐 팀의 속눈썹까지 자세하게 보이는 걸 보고 저도 넥타이에 신경 쓰기로 하였다. 자세히 보니 팀이 매고 있는 넥타이 매듭은 윈저노트로 보였다.

"윈저노트?"
"응."

맞구나. 데미안은 의외라고 생각하며 팀이 넥타이를 매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저보다 가느다란 손이 넥타이를 야무지게 매는 모습을 관찰하는 건 꽤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팀이 데미안의 넥타이를 다 매자 그는 바로 데미안에게서부터 한 걸음 뒷걸음질했다.

"...?"

뭐 문제라도 있나.

"......"

팀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그 눈빛이 데미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왜 눈을 쳐다보는 거지. 데미안은 자신을 계속 말없이 바라보는 팀에게 말을 걸었다.

"잘 맸네."
"못 맬 줄 알았어?"​
"그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손재주가 있었네.

"그럼 이제 다 된 거지? 이만 나가줄래?"

팀에게서 자꾸 자신을 쫓아내려는 모습이 보였지만 데미안은 외면하고서 다른 말을 꺼냈다.

"왜 윈저노트로 했지?"

사실 질문할 정도로 궁금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하고 싶은 말이 나오지 않고 입속에서만 맴돌았기에 다른 말을 꺼냈었다. 팀도 어이가 없었는지 표정이 썩 이상했지만 데미안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조금 뒤죽박죽에 정리되지 않은 이유였지만 데미안은 대충 흘러 넘겼다.

윈저노트로 매여진 넥타이가 마치 목을 죄 매는 것 같았다.

말을 할까? 하지만 붉은 모란이 무슨 뜻을 가진지 모른다고 했었잖아. 굳이 알릴 필요가 없는데. 충동적으로 시켰던 넥타이 시중도 다 끝났고 이제 가도 될 텐데.

"거울 있어?"

데미안은 좀 더 팀의 방에 머무르기를 선택했다.

까칠한 팀의 말에 따라 거울을 향해 걸어가는 중에 방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답지 않게 깔끔한데. 그래 녀석도 이젠 독립해서 사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데미안이 팀의 방에 찾아온 건 꽤 오랜만이었다. 애초에 그의 방에 찾아갈 일이 없었다. 그리고 팀이 따로 살기 시작하면서 아예 이쪽 근처에 오질 않았었다. 아니 어째서 생각이 이렇게 흘러가지. 오늘은 생각마저 정말 저답지 않게 흘러가는 듯했다.

팀은 꽤 단정하게 넥타이를 매주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넥타이를 보았다. 아무런 문제 없이 완벽했다. ...이제 됐어. 데미안은 거울에 비친 저 자신 너머 무언가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듯 보이는 팀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젠 진짜 가야겠군. 그는 몸을 돌려 생각에 빠진 팀에게 다가갔다.

"뭔 생각을,"
"아 깜짝이야. 발소리 좀 내고 다녀."
"......"

이 정도의 기척을 눈치 못 챘을 리가 없는데. 데미안은 팀의 인위적인 리액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로 기척을 못 느낀 것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거울 보고 왔어? 어때, 다시 환불할 정도는 아니지?"
"...후."

굳이 말해야 하나? 이 녀석이 알아서 좋은 건 없는데. 데미안은 망설여졌다. 본래 그라면 사실 팀에게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 애초에 그에게 찾아간다는 것부터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왜......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 공중에 퍼진다.

"붉은 모란은 내게 의미 있었던 꽃이야."

그 뒤로 데미안은 줄줄이 말을 내뱉었다. 팀은 데미안의 말에 반응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네가 이곳에 온 후로 모란은 더는 네 상징이 아니었겠네."

그랬다. 리그의 왕자가 아닌 저에게 모란은 더는 아무런 상징을 갖지 않았다. 이젠 어쩌다가 지나가면서 볼 수 있는 널리고 널린 꽃 중 하나일 뿐이었다. 데미안은 잠시 그의 목에 매어진 넥타이의 중앙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잡아 올렸다. 엄지로 넥타이를 매만지니 보석으로 이루어진 표면의 오돌토돌함이 느껴졌다. 붉은 모란이 그의 눈을 현란하게 비추었다. 그 새빨간 색이 너무나 정열적이다 못해 피를 한 알갱이씩 뭉쳐놓은 것 같았다. 마치 구멍이라도 뚫려 피가 송골송골 맺어지듯 붉은 알갱이들이었다. 아니. 더는 내 상징이 아니야.

데미안은 덤덤히 나머지 말을 이었다. 왜 그를 찾아갔는지도 말했다. 이제 그가 모란을 의도하고 보내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까지 말했다.

"꽃말이랑 그 꽃이 가지는 일반적인 배경은 알았지만... 네 개인적인 사정은 몰랐어."

팀의 말에 데미안은 그가 꽃말을 알고 제게 전해줬다는 사실이 의외라고 생각했다. 제일 알려진 건 부귀와 영화인데. 그 외 다른 뜻도 있겠지만... 아무튼.

"네가 내 맘에 드는 선물을 줄 때도 있다니 시간이 참 흐르긴 했네."

그래, 나쁘지 않았다. 모란은 더는 그의 상징도 뭣도 아니다. 그저 그에게 있어 부귀와 영화를 바라는 꽃으로 다가올 뿐이다.

그 뒤로는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답답한 것이 풀리고 나니 더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기분도 좀 풀린 것 같았다. 데미안은 잘 사용하겠다고 말하고, 작별 인사를 하고 그의 방으로 돌아왔다. 헤어지던 도중 얼이 빠진 팀의 모습에 살짝 웃음이 나왔던 것 같기도 했다. 뭘 저리 멍청한 표정을 짓는지 몰라. 오늘 보여준 모습들을 보건데 정말로 조만간 팀을 훈련장에 던져놓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저리 비실거리고 자꾸 말없이 생각에 잠기거나 말이야, 쯧.

그리고 지금, 데미안은 전신거울 앞에 서 있었다.

'아.'

생각났다. 또 다른 꽃말이.

'음.'

그건 그다지 그에게 뜻있는 꽃말은 아니었다.

'행복한 결혼이었나. 드레이크가 이것도 고려했을 린 없고 꽃말이야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르니 크게 신경 쓸 필욘 없겠지.'

데미안은 제 목에 걸려있는 넥타이를 다시 보았다. 여전히 새빨간 알갱이들이 미세한 각도에 따라 빛내고 있었지만 더는 불길한 피 알갱이들로 보이진 않았다. 그저 넥타이에 박힌 작은 보석들일 뿐이었다. 이제는 붉은 보석 밑에 잎과 줄기를 나타내는 청록빛의 보석도 눈에 들어왔다.

"......"

화려하기만 하고 어찌 보면 사치스럽기도 하며 딱히 실용성은 없어 앞으로도 착용할 일은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넥타이지만, 이런 관상용 넥타이 하나쯤은 진열대에 보관해두고 보아도 나쁘진 않겠지. 데미안은 천천히 넥타이의 매듭을 풀었다. 아주 단단하게 묶인 매듭이었다. 넥타이를 풀었지만 아직은 목에 넥타이가 매어져 있던 느낌이 났다. 손에 쥔 넥타이를 진열대에 대충 걸어두고서 그는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잠시 방을 살피자 책상에는 선물을 연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 치우지 않고 갔었나. 정리만 하자. 우선 아버지 선물은......

그렇게 데미안의 성인이 되고 난 첫 번째 밤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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