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로빈 팀과 레드후드 제이슨(프리런치 외형, 아직 박쥐마크x, 적당히 설정 쓰까함)


「XX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

제이슨은 지금 매우 난감했다.

"xx. 도대체 xx에 들어갈 만한 것들이 뭐가 있을까요 후드?"
"하... 인생... 글쎄다 지금부터 하나씩 알아봐야겠지."
"사실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긴 하지만 확실히 하나씩 시도해보긴 해야겠네요."

아무것도 모른 채 순수한 민낯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대체, 아니 전 로빈-팀을 보며 도무지 평정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뭐... 기다리고 있다 보면 그 사람이 오지 않겠어? 너무 음, 조급해하지 말라고. 위험할 수도 있잖아?"
"배트맨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지만 전 할 일이 많다고요. 당신은 시간이 많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전 빨리 돌아가 봐야 해요."
"뭐 집에 통금이라도 있는 거냐."
"통금은 없지만 아, 아니에요. 제가 당신에게 꼭 말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미치겠네......"

아니 정정해야겠다. 전 로빈이긴 하지만 어째서인지 모습은 과거 그 당시 현역 로빈인 팀 말이다. 제이슨이 알고 있는 현 레드로빈 팀보다 키가 더 작고 얼굴도 턱선이 좀 더 둥글고 볼살도 좀 보이는... 원래도 제이슨보다 작았는데 지금은 훨씬 더 작아진... 어린 로빈, 팀이었다. 심지어 제이슨이 지금은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타이탄즈 타워 침입 사건 때 기억 속 로빈 팀보다도 훨씬 더 어려 보였다!

"로빈."
"왜요?"
"일단... 하. 좀 앉아 있자."
"그럼 후드는 앉아서 생각해봐요. 전 조금이라도 더 이 방에 침대 말고 숨겨진 것들이 있는지 찾아볼게요."
"그래. 뭐 찾으면 불러."

아무것도 없이 새하얀 공간 속에서 덩그러니 놓여있는 침대로 걸어간 제이슨은 끄트머리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무광이라서 얼굴이 비치진 않았지만 대리석 같은 유광 재질의 바닥이었으면 거울 같이 제이슨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바닥은 깨끗하고 새하얬다. 분명 그의 부츠는 이곳에 떨어지기 전까지 크라임 앨리를 걷고 있었기에 밑창이 더러웠을 텐데도 말이다.

'xx... xx를 하지 않으면 나가지 못하는 방이라고? 미쳤어? 미친 거냐고. 쟤랑 도대체 무슨 xx를 하라고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제이슨은 다시 한번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떨어지게 되었는지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보았다.



그래, 제이슨은 분명 크라임 앨리를 걸어 다니고 있었다. 새빨간 헬멧을 쓴 채 레드후드인 상태로 고담의 밤을 보냈었다. 그날은 몇몇 경범죄를 발견하긴 했지만 그 외 큰 사건사고가 일어나지 않던 얼마 안 되는 조용한 밤이었다. 오히려 너무 조용한 나머지 제이슨은 혹시 빌런이나 범죄자 새끼들이 어디 숨어서 작당이라도 펼치고 있나 확인해보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아무런 전조 현상도 없었고 무슨 상투적인 빌런 빔 같은 매개체도 없었다. 그저 평소 같이 왼발 오른발 번갈아 내딛으며 거리를 걷고 있다가 왼발 차례가 됐을 때쯤 분명 땅에 닿아야 하는 왼발에서 단단한 지반이 느껴지지 않고 허공을 걷는 듯 밑으로 쑥 빠지는 느낌이 들었고, 그 때문에 순간 휘청거리다가 다시 오른발을 내디뎌 중심을 잡고 보니 바로 이 정신 나갈 것 같은 새하얀 방이 눈앞에 보이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가 갑자기 도착하게 된 방은 먼지나 얼룩은 전혀 보이지 않고 바닥, 벽, 천장이 아주 새하얀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는 다른 가구라곤 하나도 없이 오직 침대만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침대 역시 새하얀 침대였는데 굳이 사이즈를 재보자면 킹사이즈나 그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 같아 보였다. 흰 시트로 덮인 매트리스 위에는 머리맡 부분에 크고 하얀 베개 하나만 올려져 있었고 이불이나 담요 같이 몸을 덮을 건 보이지 않았다.



"윽, 뭐야."
"...!"

제이슨이 침대 한 바퀴를 돌아다니며 주위를 살피던 중 등 뒤에서 무언가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작은 신음이 들려왔다. 바로 뒤를 돌아보니 나타난 건 옛 슈트를 입고 있는... 로빈이었다. 제이슨은 보자마자 알았다. 데미안과는 모습과 느낌이 달랐으며 무엇보다도 이미 옛날에 본 적이 있던 슈트였다.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로빈은 팀이었다.

"로빈?"
"당신은 누구죠? 절 여기로 데려온 게 당신인가요?"

근데... 자세히 보니 제이슨이 당시 보았던 로빈-팀과는 조금 모습이 달라 보였다. 조금 더 키가 작다고 해야 하나, 조금 더 애가 둥글어 보인다고 해야 하나. 풍겨지는 느낌도 덜 무거운 것 같고 더 긴장한 것 같고... 그러니까, 어려 보였다. 자신을 경계하는지 두 손으로 기다란 보 스탭을 잡고 당장이라도 잘못되면 바로 달려올 것 같은 자세를 잡은 팀을 보며 제이슨은 난감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진정 좀 시켜야겠군.

"나도 여기 끌려왔어. 결코 널 데려오지 않았고, 나도 당한 입장이고, 너에게 뭐 할 생각 전혀 없으니까 좀 침착하라고. 알겠지?"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듯이 두 손을 살짝 위로 올리면서 천천히 말하자 팀이 보 스탭을 붙잡고 있는 손의 힘을 조금은 뺀 것이 눈에 보였다. 아이고, 진짜 애잖아. 안 들키려고 하지만 다 보이네 다 보여.

"당신도 끌려왔다고요?"
"그래. 그냥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느낌이 들어서 잠깐 움찔했더니 다시 자세를 잡으니까 여기더라고. 나도 방금 도착해서 한 바퀴 돌고 있었는데 네가 온 거야."
"어느 길을 걷고 있었죠?"
"크라임 앨리. 주변엔 아무도 없었어."
"저도 크라임 앨리에 있다가 왔는데 당신 같은 사람을 본 기억이 없어요."
"너랑 만나기 전에 내가 먼저 이곳에 끌려와서 그랬던 거 아닐까?"

대화는 다행히 잘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제이슨은 슬슬 두 팔을 내려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팔을 슬그머니 내렸다. 아 이런. 그가 팔을 내리자마자 팀이 미묘하게 다시 손에 힘을 준 모습이 보였다. 제발, 이럴 때가 아니라고.

"......"
"로빈, 네가 날 못 믿는 게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난 진짜 여기가 뭐하는 덴지 아무것도 모르고 나도 빨리 나가고 싶거든. 그러니까 서로 건들지 말고 같이 탈출구를 찾아보자고."
"이름이 뭐예요?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그냥... 후드라고 불러."
"후드."
"그래 로빈."
"당신 말이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같이 탈출구를 찾아보자는 말에는 공감해요. 각자 따로 탈출방법을 찾아보고 얘기하기로 하지요."
"좋아. 네가 그쪽을 맡아, 난 저쪽 반대편을 살펴볼게."

그 뒤로 제이슨은 다시 침대 건너편으로 가서 공간을 확인했다. 하얀 벽 표면을 장갑 낀 손으로 만져보고 두들겨도 보고 바닥도, 심지어 침대 밑 부분도 확인했건만 나오는 건 먼지 한 톨마저 없었다. 뭐야 도대체? 누가 이런 악질스러운 방을 만든 거지?

"후드. 이리 와봐요."
"오 뭐라도 찾았나 보지? 여긴 아무것도 없던데."

제이슨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약간 얇게 느껴지는 팀의 침착한 목소리에 몸을 돌려 그쪽으로 향했다. 팀은 고개를 올려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팀이 보는 시선의 방향을 따라갔더니 새하얀 벽에 희미한 홀로그램 같은 것이 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직사각형 박스 안에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XX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


"...이거 어떻게 발견했어?"
"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벽면 만져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홀로그램이 떠서 바로 부른 거예요."
"그러냐."

여기서부터 제이슨은 정신이 급격히 어지러워지기 시작하였다.

xx? XX?? XX??????
그게 뭔데. 그게 뭐냐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문장을 보자마자 쌍욕을 내뱉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참았다. 고개를 조금만 내리면 로빈인 팀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미친 방은 자신과 팀에게 XX를 하라고 강요를 하고 있었다......

아냐. xx가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닐 수도 있잖아. 그래 내가 썩었던 거야, 사실은 다른 조건일 수도 있다고. 뭐지 뭘 해야 이 방을 나갈 수 있는 거지.

"후드?"
"어. 그래. 왜."
"당신 상태가 좀 이상해 보이는데... 괜찮은 거예요?"
"어어 나쁘진 않아."
"흠. xx라. 일부러 조건을 빈칸으로 남겨둔 거 같은데 뭘 해야지만 나갈 수 있는 방이라니, 솔직히 믿기지가 않네요. 그렇다면 누군가 이 방을 감시하고 있거나 모니터링하고 있다는 건데 일단 눈에 보이는 곳엔 감시카메라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래... 카메라 있으면 당장 부숴버려야지. 미친 새끼들..."

제이슨은 무의식적으로 눈가를 쓸어내리려고 손을 얼굴로 가져다 댔지만 눈으로 향하던 손길은 헬멧에 막혀버렸다. 아 맞다... 그렇지...... 나 레드후드 상태였지.

"하아."
"당신은 xx가 무엇인지 아는 것 같은데. 이 문장 본 후부터 상태가 급격히 이상해진 거 알아요?"
"아니 나도 이게 뭔지는 몰라. 다만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끔찍해서 그런 거지."
"최악의 경우라."

제이슨은 몸을 돌려 침대 앞 방 한가운데로 자리를 옮겼다. 제이슨이 움직이자 팀도 그를 따라 걸었다.

"왜."
"xx. 도대체 xx에 들어갈 만한 것들이 뭐가 있을까요 후드?"



좋아, 다 정리했다. 아무튼 상황이 이렇게 흘렀던 거였다.

현재로 돌아와서, 제이슨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팀은 아까 말했듯 혹시 모르니 더 찾아보겠다며 방을 돌아다니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우선 xx가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래 우선 가장 최악인 것부터 생각해보자. 가장 최악인 건 역시 살인이겠지. 살인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이라니. 그러면... 나갈 수 있는 건 둘 중 한 명이라는 거니까. 생각만 해도 싸늘해졌다. 음 그다음엔 또 뭐가 될까...... 키스?

미쳤어? 미쳤냐고. 제이슨은 자기도 모르게 "으"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 미치겠다 쟤랑 뭘 하라는 거야. 뭘 하라고... 저렇게 조그만 애랑 뭘 하라고 이런 미친 짓을 벌이는 거야. 나가기만 하면 이 방 만들고 우릴 여기 가둬둔 놈들 싸그리 패 죽여버린다 진짜.

그는 얼굴, 정확히 말하면 헬멧을 감싸던 손을 풀고 밑으로 내렸다. 침대의 푹신한 매트리스가 손의 무게에 살짝 출렁거리며 내려가는 느낌이 와닿았다. 매트리스.

침대.

"미친 새끼들."
"네?"
"아, 혼잣말이야."

이 방에는 침대랑 저 홀로그램 창 빼곤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지금 어린 팀이 찾고 있긴 한데 솔직히 찾을 거라고 기대는 하지 않았다. 침대. 방 한가운데에 침대만 홀로 있는 이유가 뭘까. 그것도 2명 이상 함께 누워도 넉넉한 크기의 침대가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로빈..."
"왜요 뭐 생각난 거라도 있어요?"
"보통 침대는 무슨 용도로 사용될까?"
"보통 잠을 잘 때 사용하죠...?"
"근데 왜 이 방 가운데에 침대가 있을까?"
"음... 음...... 혹시 오래 머무르면 자라고? 아녜요 저도 이상한 말인 건 알아요."

제이슨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팀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들었다. 이윽고 고개를 올리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팀의 모습이 보였다. 도미노 때문에 마스크 너머 눈과 눈썹이 보이진 않았지만 살짝 찡그리고 있는 파란 눈이 제이슨의 머릿속에서 쉽게 상상되었다.

"앉아봐. 일단 이야기라도 해보자. 혹시 몰라, xx가 대화일 수도 있잖아?"
"대화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이라고요? 뭐 할 수 있으면 모든 시도는 해보는 게 좋을 테니 알겠어요."

팀은 곧바로 그의 오른쪽 옆에 앉았다. 제이슨은 침을 삼키며 말을 꺼냈다.

"아까 내가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말했지. 근데 너가 여기에 어떻게 왔는지는 못 들은 것 같아서."
"아 그러게요. 말할 틈 없이 바로 조사했었죠. 음 저는 아까 말했듯이 크라임 앨리 쪽을 순찰하고 있었어요. 주로 건물 옥상을 돌아다니며 순찰했고 이곳에 오기 직전에 다른 건물로 이동하려고 그랭플린 건으로 이동하던 중이었어요. 그런데 분명 건너편 건물에 갈고리가 고정된 것을 확인했는데 이동하던 도중 줄이 끊어진 것처럼 갑자기 몸이 밑으로 떨어지더라고요. 그리고 이곳으로 오게 된 거예요."
"들어보니 너랑 나랑 공통점이 밑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거네. 나도 발이 땅에 닿지 않아서 넘어질 뻔했거든. 케이스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것 같다."
"도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한 건지......"
"그러게 말이다. 할 짓 없는 놈인 게 분명해. 상당히 악질이야."

제이슨은 팀에게 말을 꺼내야 했다. 침대가 왜 있을지 같이 의논을 해봐야 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팀이 자신에게 경멸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지금 팀이 현재 자신에게 익숙한 팀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아니다. 오히려 어린 팀에게 경멸받는 건 어쩌면 데미지가 더 클 수도 있겠다.

"......"
"......"
"......"
"...... 저기, 후드."
"왜."
"왜 이 방에 침대가 있을까요?"

이건 미친 짓인 게 분명해.

"자라고 있는 거 아닐까."
"수면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이라서?"
"그랬으면 좋겠는데. 정말로."
"......"

제이슨은 갑자기 옆에 앉은 팀이 슬금슬금 제이슨으로부터 거리를 벌리며 자리를 침대 끄트머리로 움직이는 걸 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가? 쟤도 이상하다는 낌새는 알아챘나 봐.

"그... 아녜요."
"로빈."
"네?"

제이슨은 아주 천천히,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평정심을 끌어 모아서 말했다.

"만약에... xx가...... 그... s로 시작하는 그거면 어떡할래...?"
"설마... 설마겠어요? 아니, 진짜 말도 안 되는데."
"나도 진짜 설마가 설마라고 생각하거든? 아니 근데 침대가 왜 있는 거냐고 도대체."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끝은 언뜻 떨리는 듯했다. 제이슨은 살며시 고개를 돌려 팀을 확인했다. 팀은 주먹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온몸에 힘을 단단히 주며 긴장한 듯 모습을 보였다. 아 진짜 어떡해?

"후... 안 되겠다."
"네?"
"있잖아... 내가 어른이니까 그래도 차마 널 건드릴 순 없거든. 그러니까 진짜 xx가 s가 맞다면... 나중에 니가 날 깔아라."
"네?!"
"아니 넌 너무 어리잖아... 어른인 내가 감수해야지... 후......"
"아니 너무 갑작스럽다고요!"

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제이슨은 이곳에 와서 처음 들어보는 팀의 힘찬 목소리에 목청도 좋네, 같은 딴생각이 뜬금없이 들었다. 진짜 제정신 아닌가 봐. 제이슨 토드, 여기서 조금이라도 엇나가면 큰일 나는 거야. 애는 절대 안 건드린다. 정신 차려야 해.

"혹시 몰라요. 우리 아직 더 안 찾아본 것이 있을 수 있다고요. 아까 제가 맡은 부분은 다 뒤졌는데 후드는 다 확인했어요?"
"음 거의 다 확인은 했는데."
"그럼 제가 다시 한번 볼게요. 후드도 이쪽 한번 더 확인해주세요."
"그래."

제이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벽면으로 향했다. 그래, 할 수 있는 건 다 시도해보고... 뭐... 최악의 경우, 정말 이 방법밖에 없다면 내가 한번 깔려주고 이 악몽 같은 곳을 벗어나면 되겠지. 솔직히 음식도 없고 물도 없고 단지 침대만 있는 이 방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오래 있어봤자 물이 없으면 며칠도 못 가. 정말 큰일 나기 전에 차라리 빨리 하고 나가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래 비록 저 녀석에게도 트라우마로 남겠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내가 애를 건드릴 순 없다고. 사실상 다 큰 것도 아니고 지금은 너무 어리잖아 14살쯤 되어 보이는데... 아니 이건 미친 짓이야...... 이걸 고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라고.

그들은 1시간 정도 시간을 들이며 아주 꼼꼼하게 벽면을 만져보고 두드려보았다. 심지어 다리를 구부리고 몸을 숙여가면서 바닥까지 확인했건만 결국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이슨과 팀은 결국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자리는 서로 널찍하게 거리를 벌린 채 말이다. 제이슨은 조용히 두 손을 깍지 낀 상태로 정면을 응시했다. 아무런 무늬도 얼룩도 없는 하얀 벽만이 제이슨의 시야에 들어왔다.

"후드."
"왜."
"궁금한 게 있는데 왜 헬멧을 쓰고 있어요?"
"넌 왜 도미노를 끼고 있는데?"
"얼굴 가리기 위해서겠지요? 물론 헬멧도 그 용도로 쓰는 건 알아요. 그런데 좀 더 근본적인 물음인 거예요. 아무리 봐도 그 빨간 헬멧, 그냥 평범한 헬멧으로는 안 보이니까."
"뭐 맞아. 평범한 헬멧은 아니지. 그런데 지금 시스템이 먹통이라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평범한 헬멧이나 다름없는 상태야."

제이슨은 손가락으로 헬멧을 두어 번 톡톡 쳤다. 팀이 자신을 바라보는 있는 모습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보이는 것 같았다.

"헬멧 안에 시스템이 있었어요? 저도 이곳에 오자마자 통신이 끊기긴 했어요."
"외부 차단을 단단히 해놓은 모양인데."
"도대체 무슨 짓인 건지...... 보 스탭으로 아무리 쳐봐도 벽에 금 하나 가지 않더라고요."
"잠깐만. 나 총 있는데 이거 안 써봤거든? 한번 쏴볼게. 놀라지 마."
"네?"

생각해보니 제이슨에겐 총이 있었다. 권총이라서 벽을 뚫기엔 힘이 그렇게 센 건 아니지만 팀의 무기보다는 훨씬 더 위력이 강할 테였다. 제이슨은 가죽자켓 품 안으로 손을 넣어 총을 꺼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걸어 앞으로 나아갔다. 하나, 둘.

탕탕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화약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벽은 놀랍게도, 하얀색 그대로였다. 그을림이나 총알 박힘 따윈 어디로 가고 하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럼 총알은 어디에 있냐 하면 2개 모두 벽면 밑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런 미친."
"맙소사."
"무력으로는 밖에 못 나간다는 건가."
"조건을 달성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는 걸까요."

손에 쥔 총에서 열감이 올라왔다. 젠장 이게 안 통한다고? 뭐 이 벽은 결계라도 쳐 있는 거야? 제이슨은 총을 벽에 던졌다.

"무슨 짓이에요! 오발 나면 어쩌려고...!"
"걱정 마 안 났잖아."
"아니... 이제 어떡해요?"
"그러게? 아까 내가 말한 거 생각은 해봤어?"
"미쳤어요?"
"나도 진짜 미칠 것 같다."

제이슨은 몸을 돌려 팀을 쳐다봤다. 그가 조용히 응시하고 있으니 팀이 먼저 시선을 밑으로 내려 제이슨을 피했다. 초록색 장갑을 낀 두 손을 깍지 낀 채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는 모습을 보니 환장할 지경이었다. 검은빛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그리고 묘하게 둥근 얼굴 쪽으로 조금씩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잠시 가졌던 그 일말의 생각 때문에 죄악감이 슬그머니 올라오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돌겠네.

"xx가 살인이면 어떡하지?"
"으 그건 더 최악이에요."
"그래 그건 더 최악이겠지."
"하...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지."
"그러게 말이다. 이 시간쯤이면 슬슬 자야 하는데."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제이슨은 이제 뭘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여기서 뭘 더 해야 하지? 생각해보면 정말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심지어 팀은 과거의 모습인데 이거 시간 선도 지금 꼬인 거 아닌가? 내가 과거로 온 건지 얘가 미래로 온 건지도 알 수가 없는데. 되도록 서로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건만 아무래도 서로 시간대가 다르다는 걸 어린 팀도 알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후드."
"응?"
"헬멧 벗어봐요."

뭐??

"갑자기?"
"어쩔 수 없잖아요. 우리 하나씩 해보자고요. 심폐소생술은 몇 번 해봤으니 생명 하나 살린다는 생각으로 대충... 대충 해보고......"
"미치겠네......"
"이제 슬슬 그런 류의 말들은 그만 꺼내도록 하죠. 저라고 안 그런 줄 아세요?"
"알겠어. 속으로만 생각할게."

미치겠네.

그 순간 제이슨은 헬멧을 벗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선택지를 고를 수 없었다. 아니, 진짜로 미친 짓이야. 이건 결코 건강한 관계가 아니라고. 어떡하지? 막상 직접 때가 다가오니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쟤에게 무슨 말을 한 거지. 내가 애를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는 거 아니야? 이런,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는데.

그때였다. 갑자기 제이슨의 헬멧을 붙잡는 손길에 제이슨은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돌아가던 생각을 멈추고 뿐만 아니라 그 순간만큼은 호흡조차도 잠시 멈추게 되었다.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옆에서 자신의 헬멧에 손을 댄 팀을 쳐다보았다. 팀은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제이슨의 헬멧을 벗기려 하고 있었다.

"벗길게요."
"어, 어?"

이거 막아야 하나? 두 손을 일단 위로 올리긴 했는데 지금 이 순간도 천천히 헬멧을 꺼내려는 팀의 손목을 차마 잡지는 못하고 제이슨은 결국 손을 허공에 애매하게 떠 있는 상태로 놔두었다. 그리고... 끝내 헬멧은 정수리 끝까지 올라갔고 그는 장기간 헬멧에 의해 답답했던 머리가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미노?"
"아. 나 도미노 쓰고 있었지."
"자경단이었어요? 본 적이 없는데."
"그 뭐 일단 그렇다고 해둘까?"
"뭐예요 진짜."

팀은 완전히 꺼낸 제이슨의 헬멧을 제 품에 안은 채 그의 옆에 앉아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빨간색 도미노 마스크를 쓰고 있어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검은색 곱슬기 있는 머리카락 가운데 살짝 난 흰색 머리카락이(새치인 걸까?) 눈에 띄었다. 그런데...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했다. 누구지?

"후드."
"응."
"...왜 당신은 처음부터 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죠?"
"뭐? 그야 뭐... 로빈이잖아. 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제 말은, 로빈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해 왜 궁금해하지 않았냐는 거예요. 물론 딱히 말할 기회가 없긴 했지만 사실 한번쯤은 꺼내볼 만도 했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저에 대해서 묻지 않았잖아요."
"내가 아까 집에 통금이라도 있냐고 물은 건?"
"그건... 물은 게 맞긴 한데. 아니, 생각해보니 왜 자연스럽게 집에 대해 언급했죠?"
"아니 그야 뭐... 너도 집이 있긴 할 거 아니야. 설마 박쥐 따라서 동굴에서 지내기라도 해? 뭐 아님 폐허라던가?"
"박쥐 따라서 동굴이요?"
"왜. 흔히 떠도는 이야기잖아."

큰일이다. 제이슨은 팀이 자신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 걸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무의식의 흐름대로 보내버려? 이게 무슨 소리야. 나도 모르겠어.

"그럼 아까 전 질문으로 돌아갈게요. 자경단이에요?"
"흠 지금은 대충 비슷한 거 같다."
"빌런이었어요?"
"그건 절대 아닌데. 근데 너네 기준으론 나쁜 짓도 조금 했지."
"고담에 온진 얼마나 되었죠?"
"이봐, 나 고담 태생이야."
"그렇지만 배트맨이나 저나 당신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걸요. 이제 갓 개과천선 하기라도 한 거예요?"
"비슷하지?"
"우리 기준으로 나쁜 짓을 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음......"

팀은 질문이 많았다. 제이슨은 한치도 놓치지 않고 연달아 질문을 날리는 팀의 모습을 잠시 말없이 보았다가 드디어 자유로워진 제 이마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이어 대답했다.

"나쁜 사람을 무찔렀는데 좀 과격했다고 해야 하나."
"...사람을 죽인 적이 있어요?"
"굳이 대답해야 해?"
"있군요. 당신은 사람을 죽인 적이 있어요."
"부정하진 않을게. 그 새끼들은 지옥에 떨어져도 마땅한 놈들이었어."

제이슨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팀을 바라봤다. 자신은 후회하지 않는다는 듯 말하는 그 눈빛에 팀은 한숨을 푹 쉬고는 계속 품속에 끌어안았던 헬멧을 옆 빈자리에 놔두었다.

"하아, 도대체 왜 나는 이런 사람이랑 갇히게 된 건지."
"저기 듣는 사람 조금 상처 받거든."
"좋아요 계속 질문할게요. 후드, 정확한 풀네임이 뭐예요?"
"이미 질문이 아니라 심문으로 넘어간 건 알고 있지? 풀네임이라, 진짜로 후드야."
"거짓말 마요. 후드를 포함한 전체 이름을 말해줘요."
"휘유. 안 속네. 그래, 내 이름은 레드후드야."

말했다. 말해버렸어. 제이슨은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게 노력하면서 조심히 팀의 반응을 살폈다. 팀은 제이슨의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가 입을 열었다.

"조커?"
"그 새끼 이름은 꺼내지도 마. 내가 정말 증오하는 놈이니까."

저도 모르게 으르렁대는 듯 목소리가 긁히며 나왔다. 제이슨은 아차 싶어서 바로 다음 말을 꺼냈다.

"그냥 그놈이랑은 악연이 커. 넘어가자고."
"......"

팀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제이슨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저기... 로빈? 심문 끝난 거야?"
"레드후드."
"어?"
"실례할게요."
"아니 잠깐."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팀은 바로 두 손을 제이슨의 얼굴 양볼에 가져다 대고 그의 얼굴을 제이슨 쪽으로 가까이 들이댔다. 급작스러운 접촉에 제이슨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미친 잠깐만! 잠깐만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아니 팀 얘가 이렇게 단결력 있는 애였나. 아 어 그렇긴 하지. 하려면 다 하는 애긴 한데 근데 이건 아니지! 점점 더 가까이 오는 팀의 얼굴을 보다가 새삼스럽게 역시 자신이 알고 있던 팀보다 훨 더 어린 모습을 보며 제이슨은 결국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리고.

제이슨은 자신의 눈가가 시원해지는 걸 느꼈다.

"......이상하다 했어."
"......"
"제이슨 토드."
"하하, 나 진짜 병신인가."
"제이슨... 정말 당신이에요? 내가 아는 그 제이슨?"
"그래 팀. 응, 나 맞아. 안녕."

잠시 정신 붙잡고 있는 걸 포기해버렸었다. 난 나가 죽어야 해.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왜 눈을 감은 거야. 뭘 기대한 거야? 진짜 사람이 할 짓인가? 이 정도면 나 정말 짐승 새끼 아니야? 내가 나 스스로 총 쏴도 인정인 거 아니냐고.

"제이슨. 정신 차려요."

제이슨은 팀이 자신의 볼을 약하게 톡톡 두드리는 것을 보았다. 하... 손이 너무 작다...... 장갑을 꼈는데도 작아... 이 애한테 내가 무슨 생각을......

"제이슨."
"왜 그래 팀."
"제가 생각해봤는데요. 당신이 절 처음부터 친근하게 대한 것도 그렇고 정체 들키자마자 바로 이름 부르는 것도 그렇고 당신 세계에서 저도 로빈을 했나 싶긴 하지만, 아무튼 전 제이슨이 사는 차원의 팀이 아닌 평행세계 속 팀인 것 같아요."
"평행세계?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아니에요? 당신은, 제이슨은 뭔가 알고 있어요? 하지만......"

팀의 조금 다급하면서 불안감을 담고 있는 목소리에 제이슨은 잠시 놓았던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뭘 숨기랴. 빨리 터놓고 당장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평행세계 아니야. 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거니까."
"뭐......"
"그냥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별로 얘기하고 싶진 않고. 다만 내 현재 시간대에 넌 다 컸거든. 그래서 널 보자마자 알았지, 아 내가 과거로 떨어졌거나 혹은 너가 미래로 떨어졌거나 혹은 웬 시간선 섞인 차원으로 우리 둘이 떨어졌다는 걸 말이야."
"그런... 아니 진작에 얘기해주셨어야죠!"
"처음에는 정체 밝혀봤자 도움 될 게 없는데 어떡해. 오히려 너무 인위적이라고 느껴서 네가 더 경계심을 놓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이미 지나간 이야기니 그만 할게요.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됐어요."

팀이 팔짱을 끼며 제이슨을 쳐다보았다. 올려다보았다고 하는 게 좀 더 맞는 표현일까? 제이슨은 자신의 얼굴과 특히 눈동자를 계속 응시하는 팀의 시선을 저도 같이 응시하며 말을 꺼냈다.

"너도 도미노 벗어."
"아."
"불편하지 않아? 그리고 나만 이렇게 벗고 있으면 발가벗은 기분이 들거든. 나 무장도 심지어 안 했잖아. 총도 저기 버려놨고."
"무슨 비유를... 이미 정체를 서로 아는 마당에 도미노가 상관없기는 하니까, 알았어요."

팀은 투덜거리며 손을 눈가로 가져다 대고 도미노를 얼굴에서 빼내었다. 오, 눈이랑 눈썹을 보니 확실히......

"어리네."
"제 나이쯤이면 더는 어리다는 말은 안 듣거든요?"
"아이고 티미보이... 집에서 마법사와 워록 게임이나 더 하면서 보내야 할 시기에......"
"그, 머리 쓰다듬지 마세요!"

헛, 나도 모르게 그만. 제이슨은 저도 모르게 어린 팀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던 손을 다시 제 몸 쪽으로 가지고 왔다.

"......"
"......"
"......제이슨."
"응?"
"진짜로 해야 할까요?"

젠장 그러게. 진짜 해야 하나? 비밀도 지금 다 털어놓고 대화했는데도 안 돌려보내 주네? 대화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은 아니라는 건가? 하하하.

"아니. 지금은... 지금은 아니야."
"이 공간엔 물도 음식도 없어요. 지금이야 괜찮지만 앞으로 점점 배가 고파지고 무엇보다 물을 못 먹게 되는 건 심각하다고요. 그리고 화장실도 없으니 씻을 수도 없고... 오 이런."
"그래 심각한 상황이긴 한데. 너 안 졸리니? 난 사실 슬슬 졸리거든? 어쩌면 침대가 있는 이유가 정말 단순히 자라고 있는 방일 수도 있잖아. 수면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인 거지. 일단... 자는 거 어때?"
"자라고 있는 침대에... 이불이 왜 없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진짜 이제는 생각으로도 말하기에 입이 아플 지경이지만, 이 방을 만들고 침대 소품까지 철저하게 준비한 그놈들... 정말 할 짓 없이 시간 넘치는 미친 새끼들인 게 분명하다.

"롭, 아니 팀. 넌 로빈 망토 있으니까 그거 덮고 자. 자, 내가 왼쪽 사용할게 너가 오른쪽 사용해. 알겠지?"
"이렇게 갑자기 잔다고요...?"
"그냥 한숨 자고 다시 생각해보자고. 그 사이에 내 세계 일행이든 네 세계의 배트맨이든 구조하러 올 수도 있잖아."
"...그래요 그럼."

팀은 내키지 않다는 듯한 말투였지만 제이슨은 아랑곳 안 하고 바로 움직였다. 그 뒤로 둘은 짐을 바닥에 정리해놓고 침대에 누웠다. 잘 때 불편한 가죽자켓이나 장갑, 신발 따위를 벗고 제이슨은 침대의 왼쪽 바닥에, 팀은 건너편 침대의 오른쪽 바닥에 짐을 내려놓았다. 실은 이렇게 일부를 벗어도 몸 가운데 여전히 입고 있는 슈트 자체가 일상복보다는 덜 편하겠지만 이것까지 벗기에는 좀... 아닌 것 같았고 팀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가운데가 빨갛고 양쪽 반팔 소매는 초록색인 옛 로빈 슈트를 여전히 입고 있었다. 제이슨은 침대에 누운 상태로 팀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 몸을 왼쪽으로 뒤돈 채 먼저 누웠다. 곧 팀도 누웠는지 침대가 잠시 출렁거렸다가 금방 푹신하게 균형을 잡았다. 둘 사이엔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조금씩 움직이면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부스럭거리는 소음이 둘 사이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침묵이 계속 이어지고 있던 때, 어느 순간 새하얗던 방에 밝기가 점점 줄어들더니 전등이 약해져서 금방이라도 불이 꺼질 것 같이 조명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그 색깔이 눈에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미색이라 마치 무드등이라도 킨 듯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흠, 지금 보니 점점 난방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공기가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또라이 새끼들, 이거 지켜보고 있는 거 아니야? 분위기 조성이라도 하는 거야 지금? 괜히 의식하게 되어선 제이슨은 불편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 제이슨은 빨리 잠이나 자려고 눈을 감고 생각을 멈추려고 했다. 팀이 조용히 그에게 말을 걸기 전까진 말이다.

"저기 제이슨......"
"응, 왜."
"그... 음 아녜요."
"아니야, 말해봐."
"가죽자켓 안 덮어요?"

제이슨은 잠시 픽 하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팀에게 말해주었다.

"안 덮을 건데. 왜, 추워?"
"아니 저는 망토 있으니까 덮고 자는데 제이슨은 아무것도 없이 그냥 눕길래요."
"난 별로 안 추워서 그렇지. 가죽 냄새나고 별로 좋을 게 없어서 그래."
"그래요?"
"응."

그 이후로 잠시 팀의 말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역시 추운가 본데.

"팀."
"음?"

제이슨은 바닥으로 손을 뻗어서 마침 바로 잡히는 가죽자켓을 잡고 팀 쪽으로 던져주었다. 상태 확인만 해보자. 그는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 팀의 상태를 확인했다. 하이고, 로빈 망토에 몸을 구겨 넣었지만 삐쭉 튀어나온 다리가 눈에 띄었다. 최대한 구부려서 망토 안으로 몸을 집어넣으려고 한 흔적이 보였다. 내 가죽자켓 다리 쪽으로 덮으면 딱이겠는데. 거리가 멀어지니 가죽 냄새나 화약 냄새도 덜 나겠지.

"덮어. 다리에 덮으면 딱이겠네, 냄새도 덜 날 거고."
"어 그래도 자켓인데 아니에요. 망토를 밑으로 내리고 위로 덮을게요."
"아냐 그거 가죽, 화약 냄새 나서 네 코만 불편할 거라고. 이따가 은근슬쩍 밑으로 내려도 못 본 척해줄 테니까 코 아프면 바로 내려."
"정말 괜찮은데. 알았어요."

그러고는 팀이 정말로 가죽자켓을 제 어깨 쪽에 덮으려는지 한동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많이 들려왔다. 제이슨은 다시 몸을 왼쪽으로 돌렸다. 기온이 떨어진 게 기분 탓은 아닌지 조금 쌀쌀해진 것이 느껴졌다. 이 정도는 참을만해. 부스럭대는 소리가 다시 줄어들고 둘 사이에 정적이 흘러 숨소리조차 적나라하게 들릴 쯤, 팀이 다시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이상해요."
"뭐가?"
"이 상황 자체가... 모두 다 말이에요. 마치 꿈같아요."
"그래? 어떤 면이."
"그냥... 제이슨이 살아 있는 미래의 모습을 제가 보고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뭐 이 방의 존재도 말이 안 되고......"

말이 안 되긴 했다. 제이슨은 가볍게 헛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허 그래, 차라리 꿈으로 여겨. 나중에 돌아가고서 바로 잊어버리고."
"꿈이든 꿈이 아니든 잊을 수 없는 경험인데 어떻게 잊어버려요."
"억지로 잊으려 애써봐."
"굳이 그렇게까지 잊고 싶은 기억은 아닌걸요?"
"그러냐?"
"네. 음 아직까지는."

그리고 다시 정적. 제이슨은 슬슬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팀을 보며 긴장한 게 눈에 훤히 보인다고 했었는데 나도 못지않게 긴장했었나 본데. 쟤 눈에도 내가 긴장한 모습이 보였을 수도 있겠는걸.

"돌아가면 찾을게요."
"뭐?"
"살아난다면서요. 그리고 또 선을 넘었다고도 말했고. 그렇지만 개과천선했다면서요. 살아난 뒤 뭔가 일이 있었단 거잖아요."

젠장 그때 너무 정신을 놓고 있었어. 역시 그런 건 이야기하지 말걸.

"팀... 아니야. 찾지 마."
"왜요?"
"음, 너가 몇 살이지?"
"14살이에요."
"그래? 그쯤이면 이미 찾기 어려울 수 있을 거 같은데."
"찾으려 하면 결국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제이슨이 살아있다는 게, 혹은 살아난다는 게 확실하니까. 포기하지 않을게요."

제이슨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등 뒤로 팀의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어쩌면 당신에겐 미안한 말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죄송해요......"

그 소릴 듣자마자 제이슨은 눈을 번쩍 뜨곤 몸을 바로 돌렸다. 반대로 몸을 돌린 채 팀을 쳐다보니 그는 천장이 눈앞에 보이는 정자세로 누워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거야. 아니야. 나 아무렇지도 않다고."
"방금 제 말은 결국 제 세계의 제이슨을 당신처럼 놔두지 않겠다고 한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 소리는 지금의 제이슨은 마치 안 되었다는 듯이... 들릴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입장에서는 제이슨을 위해 행동하려고 한 말이었지만, 만약 우리가 같은 세계의 사람이고 단지 시간선만 다른 거면 제가 한 행동으로 인해 지금 제 옆에 있는 제이슨이 사라지게 될 수도 있는 건데 제가 너무 섣불리 말했던 것 같아요."

그런 생각 나는 하나도 들지 않았는데. 뭐 팀의 행동으로 인해 나비효과가 일어나 그쪽의 제이슨은 만약 나와는 달리 꽤 온화한 방법으로 일찍 돌아온 탕아가 된다면 걔 입장에선 음, 뭐 걔도 처음에는 꽤나 혼란스럽겠지만 어쨌든 적어도 후회할만한 짓은 덜 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아. 넌 날 위해서 그렇게 말했던 거잖아. 오히려 조금 감동이었다고?"
"전혀 그래 보이지 않거든요. 아무튼, 그래도... 포기하고 싶진 않으니까 최대한 좋은 방법으로 제이슨을 다시 만나기 위해 노력할게요. 만약 제가 늦어서 이미 선을 넘은 상태의 당신을 만난다고 해도, 지금의 제이슨을 생각하면서 침착하게 대응하면 함께 최선의 방향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음......"

듣기엔 좋은 소리였다. 그러나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그 시기 자신은 냉철하게 말해서 팀이 무엇을 하든 간에 무시할 가능성이 컸다. 과거 로빈인 팀을 대체품으로 인식하고 부르고 때리던 시기를 생각하면... 만약 정말로 그때와 똑같은 일이 또 발생한다면 나에 관한 좋은 인상은 다 박살 나고 말 텐데.

"그냥, 내가 상태가 정말 안 좋아 보이면 나랑 맞설 생각 하지 말고 냅다 도망가버려."
"네?"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살아나면서 부작용이 좀 생겼거든? 그때 내가 화가 좀 많았어. 거의 내 뜻과 다르면 적대로 생각하고 혼자 다니던 시기라서. 타이탄즈 타워에서 날 보면 절대로 내가 무슨 말을 하던 간에 무시하고 그냥 도망가거나 동료를 모아. 알겠지?"
"타이탄즈 타워요? 미래에 제가 틴 타이탄즈에 들어가요?"

팀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놀라는 억양이 들렸다. 팀은 고개를 돌려 제이슨을 쳐다보았다. 눈빛이 초롱초롱한 게 놀람과 신기함, 조금은 기쁨의 감정이 드러나보였다. 제이슨은 무안하다는 듯이 턱에 손을 글쩍거리며 이야기했다.

"스포 해버렸나."
"세상에."
"너무 놀랄 것도 없지 않아? 넌 로빈이잖아. 타이탄즈의 초대 로빈 딕 그레이슨의 뒤를 잇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그렇지만... 그래도 추측만 하는 것과 기정사실화 되는 건 다르다고요!"
"흠 다른 얘기로 넘어가 보자고. 티미, 친구들은 어때?"
"친구요? 어느 친구들을 말하는 거예요?"
"아 말하는 투를 보니 아직 안 만난 건가. 새삼 내가 정말 어린 시기의 널 만난 거구나."
"그렇게 어린것도 아닌데... 말하는 투만 보면 날 너무 꼬마 취급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14살이면 kid지 안 그래? 아님 boy로 불러줄까? boy 정도면 그래도 좀 소년 취급이지?"
"됐어요... 안 깨울 테니 잠이나 자요."

팀은 더 말하고 싶지 않은지 제이슨을 바라보던 몸을 다시 천장을 향해 돌렸다. 제이슨도 따라서 천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볼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은은히 빛나는 조명 덕분인지 분위기는 있어 보였다. 어쩌면 아까의 새하얀 방이 너무 최악이라서 차악으로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겠다 싶지만 말이다. 제이슨은 눈을 감았다.

그렇게 두 명은 잠에 드는 듯싶었다. 적어도 제이슨은 이제 정말로 피로가 쌓여서 몸이 잠을 원하는 걸 느꼈다. 계속 되는 적막 속에서 숨을 고르게 내쉬며 점점 잠에 빠져들 때쯤 순간 미세하게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오른쪽 귓가에 포착되었다. 뭐라고 속삭이는 것 같은데......

"......자요?"
"......"
"자나 보네."
"......"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겠지. 제이슨은 아직까지는 연결되어 있는 정신줄을 다시 천천히 놓아주기 시작했다.

"제이슨."

"......좋아해요."

......?

??

!

좋아, 침착해. 절대 내가 아직 자고 있지 않고 깨어 있다는 상태인 걸 들키지 말아야 해.

"내 상상 속의 제이슨이 아니라 실제 제이슨이라니. 정말 말도 안 돼......"

나도... 나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내가 방금 들은 게 진짜인가? 도대체 왜?

왜 나를? 오늘 처음 본 나를? 상상 속 나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게 아니라?

"......"

"자는 거 맞죠?"

아니. 자려고 했는데 잠 다 깨버렸어.

"숨소리는 자는 것 같은데..."

좋아, 제이슨. 최대한 이 상태의 몸을 그대로 유지해야 해. 넌 할 수 있다.

"......"

......

"좋은 꿈 꿔요...... 로빈."

뭐.......

제이슨은 팀이 움직이며 내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집중해서 들었다. 이건 몸 전체를 돌리는 소리 같고, 손도 움직이고 있는 건가. 가죽을 맨손으로 만졌을 때 나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자켓... 자세를 다시 잡고 있는 거겠지. 몸을 뒤척이는 소음이 발생하던 빈도는 점점 낮아졌고 이내 서로 다른 일정한 박자의 두 숨소리만이 그의 귓가에 들려올 때, 제이슨은 조심스럽게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보았다.

"......"

그의 시야에 들어온 풍경은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린 상태로 곤히 자고 있는 팀이었다. 한 손은 자유롭게 매트리스 위에 올려놓고 한 손은 가죽자켓을 어깨 위로 끌어당긴 상태로 자는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살짝 고개를 밑으로 숙이고 잤기 때문인지 흰 이마와 콧대가 보였고 그다음은 눈을 감은 채 미동 없는 검은 속눈썹이었다. 아까 전의 나처럼 자는 척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이슨의 판단으로는 잠에 들은 것 같았다.

"......"

잘 자네.

그래서... 좋은 꿈 꿔요, 로빈?

이 말의 의미는 무얼 뜻하는 걸까. 물론 내가 2번째 로빈이긴 했지만 기간도 짧고 그닥 성공하지도 못하고 잊혀진 로빈이었는데. 어째서.

아니다. 느끼고 있었다. 제이슨은 팀이 자신을 로빈이라고 지칭한 순간 그전에 말했던 '좋아해요'의 의미도, 왜 자신을 로빈이라고 불렀는지도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걸 내가 의식적으로 생각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앞날에 별 문제 생기지 않을 것이었다.

...정말 잘 자네.

자고 있는 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제 세계의 팀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까 팀의 말을 듣고 떠오른, 옛날에 팀이 자신에게 말했던 그 말도. 마스크를 쓰고 있을 땐 내 그늘 아래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했었지. 그래. 그렇기 때문에 날 로빈이라 불렀던 거겠지. 항상 상상으로만 만나왔던 로빈을 실제로 보니 환상이 깨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동일인물이긴 하니 꿈속에서만 말해보았던 말을 실제 입 밖으로 내뱉어보았을 수도 있고. 그런 걸 거야. 그런 거겠지.

나는 미래의 네게 최악으로 다가갔는데. 자신이 제이슨 토드임을 안 후 분명 복잡했을 텐데도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며 호감을 드러낸 어린 팀을 생각할수록 점점 그럼 저쪽의 팀은 내게 얼마나 실망을 했을지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지금이야 데면데면하게 얼굴 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야기 잘만 하지만... 역시 마음에 걸렸다.

좋아한다라... 좋아한다...... 어린 팀이 내게 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녀석도 이 생각을 가지고 자라왔다는 건데.

아직도 날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그가 생각하기로는 아닐 것 같았다.

없던 실망도 생겨났겠지. 난 첫 만남부터 걔 자존심을 부수려고 했는걸.

......

복잡하다. 정작 내게 이런 복잡한 심정을 안겨준 작은 팀은 맘 편히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자고 있는데 말이야.

"팀."
"......"

미안해.

"고마워."
"......"
"잘 자."

자야겠다. 제이슨은 얼굴이 천장으로 오도록 몸을 돌리고 눈을 감아 다시 잠을 청했다.



.
.
.



제이슨이 눈을 떴을 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뭐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니 자신의 세이프 하우스 중 한 곳이었다. 일어난 곳은 제가 본래 자던 싱글 사이즈 침대였고. 돌아온 건가? 설마 진짜로 수면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이었던 거야?!

"x발......"

난 도대체 무슨 삽질을 했던 거지. 하마터면 그 애랑... 내가 인간의 탈을 버릴 뻔했잖아.

"......"

우선, 배가 고팠다. 일단 씻고 아침 먹으며 생각해봐야겠다고 생각한 제이슨은 가만히 서 있던 몸을 화장실로 이끌었다.

씻고 나서 가볍게 시리얼로 아침을 때우고 있을 때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핸드폰 알림인 듯싶어 서랍 위에 올려놓았던 폰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와 화면을 켰다. 공교롭게도, 팀의 문자였다.

-어제 왜 연락 안 받았어?

어젯밤을 말하는 건가. 그야 수못방에 갇혀 있었으니 그랬지. 그러나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려면 답이 없었기 때문에 제이슨은 적당히 핑계를 댔다.

일이 있어서 통신 막아놨어 무슨 일인데-
-조사할 게 있어서
자료 가지고 가줄까?-

......이건 정말 아무런 의도가 없는 거야. 난 단지 팀을 도와주려고 한 거라고. 만나서 겸사겸사... 얘기도 좀 하고.

-굳이? 그냥 보내주기만 해도 되는데

음. 바로 거절당했네.

-아니다 가지고 와 봐, 설명 들을 게 있으니까
그래 뭐 필요한지 말해-

그뒤로 팀은 리스트가 담긴 문서를 하나 보냈다. 제이슨은 리스트를 켜고 하나씩 확인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서 우선 좀 도와주고. 그다음은... 그다음은......

'좋아해요.'

왜 자꾸만 떠오르는 거냐고.

제이슨은 두 손으로 제 머리를 헤집으며 괜한 생각 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른 생각을 하자. 작은 팀도 집에 잘 돌아갔겠지? 내가 지난밤을 기억하는 걸 보니 그 애도 어쩌면 기억하고 있을 수 있겠는걸. 잠깐. 우리가 같은 세계에 살았으면 그 애가 커서 지금 만나는 팀이 된 거 아니야? 어떡할까. 모르겠다, 일단 만나 봐야지. 뭐가 됐든 일단 만나기로 했으니.

만나서, 이야기해보자. 이김에 그동안 걸렸던 것들도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해보자고. 그 다짐을 하며 제이슨은 집을 나섰다.


.
.
.



"팀, 어제는 잘 들어갔니?"
"네. 괜찮았어요."

브루스의 물음에 간단히 대답한 팀은 유리창 건너 2대 로빈의 슈트를 찬찬히 관찰하고 있었다. 로빈. 후드... 레드후드. 제이슨 토드.

어젯밤은 정말 꿈이 아니었던 걸까?

그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로빈 슈트를 입은 채 자신의 방에서 깨어남을 알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누가 들어올세라 빠르게 슈트를 벗고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생각해볼 수 있었지만 명확한 정답을 내리진 못했다. 제이슨이 말했던 대로 정말 수면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이었던 걸까?

"......"

동굴 안에서 여러 특정 물품들과 마찬가지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영원히 전시될 로빈 슈트는 항상 팀에게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이전과는 결이 다른 생각들이 계속 팀의 머리를 떠다니고 있었다. 제이슨. 제이슨은... 살아있어.

지난날, 자신이 직접 사진을 찍으며 멀리서 보아왔던 로빈은, 더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로빈은 살아났다. 다시 한번 더 만나볼 수 있었다. 비록 그 모습이 이전과는 다를 지라도.

"......"

다시 만나고 싶다.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먼저는 묘지부터 다시 확인해봐야겠지. 그는 몸을 돌렸다. 로빈 슈트는 이제 그만 보아도 충분했다. 가자. 팀은 동굴을 나섰다.



.
.
.
.





「XX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


「□□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


「고백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

'DC comics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콘팀 - 플레이어콘 ai요정팀 /게임AU  (0) 2021.08.08
뎀팀 - 붉은 모란  (0) 2020.05.05
[조각글] 피아노 연주 듣는 팀  (0) 2020.04.04
슨팀 - 흔적  (0) 2019.09.27
팀른 백업(슨팀,뎀팀,보고싶은것)  (0) 2019.09.24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링크
«   2024/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