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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 게임을 시작한 지 어언 일주일째.

"코너님, 이번엔 마계의 숲으로 가보는 건 어떨까요?"
"마계의 숲? 아직 레벨이 좀 모자라지 않아?"
"코너님께선 피지컬이 다른 분보다 좋으신 편이니, 컨트롤만 잘하신다면 더 빠르게 레벨업 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흠... 좋아 가자!"

나는 어쩌다 보니 게임 속 ai 캐릭터, 그것도 게임 첫 시작할 때 튜토리얼 소개만 해주는 안내원 캐릭터랑 여행을 하고 있었다.

"네. 그곳은 꽤 어둡지만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알이 열린 나무가 빛나는 곳이 있는데 거기가 좋은 자리라고 하더라고요. 거기까지 길을 뚫으면 될 거예요."
"좋아, 고마워 팀. 이런 정보까지 알려주고."
"코너님과 같이 다니는 건 제게도 꽤 즐거우니까요."
"그, 그래? 나도 너랑 같이 다니는 거 재밌어서 좋아. 혼자서는 재미없더라고."

왠지 모르지만 나는 이 실제로 살아있지도 않은 게임 프로그램 ai에게 정이 들어버린 것 같다......

"팀."
"네 코너님?"
"음... 아냐. 얼른 가자."
"네 좋아요. 가죠."

하... 젠장 친구랑 게임하려고 시작한 게 내가 ai 캐릭터에게 빠지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이건... 어디에다가 털어놓지도 못하잖아!




그러니까 사건의 발단은 이번 여름방학이었다. 종강을 하고 나서 이것저것 활동하며 시간을 보내겠다는 다짐은 금세 바닥나고 할 거 없어서 폰만 보던 때에 바트에게 걸려온 전화가 이 모든 상황의 시초였던 거다.

"헤이 콘! 요즘 뭐 하고 지내?"
"할 거 없어서 만화나 읽고 있어."
"그래? 그럼 같이 게임이나 할래? 그거 있잖아, 캡슐형 리얼 가상현실 게임! 나 저번에 새로 시작한 게임 있는데 진짜 완전 대박이야! 꿀잼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니까. 캡슐이 좀 비싸긴 한데 요즘 보급형 기기도 많이 나왔고 그러니까 하나 장만해서 나랑 겜하자. 어때? 사실 피시방 가서 해도 괜찮아! 시간제 요금이 다른 컴퓨터보다는 조금 더 비싸긴 하지만."
"뭐? 캡슐형 게임은 좀... 그래도 좀 위험한 거 아니야?"

캡슐형 게임. 사용자가 캡슐 안에 들어가고 머리에 뭐 간단한 선을 연결하면 뇌파가 컴퓨터랑 반응해서 이것저것 무슨 하이테크놀로지가 들어가서 정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것처럼 가상현실 세상에서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게임을 말했다. 첫 캡슐이 나왔을 땐 다들 혁신이라고 말하고 난리가 났었는데 신기술이다 보니 버그도 있고 로그아웃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았던 사고도 있고 여러 가지 시끄러운 이슈가 많았다. 그것도 다 옛날얘기고 이제는 보급이 잘 이루어져서 대부분 피시방에서도 게임 캡슐들이 설치되어 있긴 하지만......

"보급형 보통 얼마야?"
"내가 제일 싼 할인가에 살 방법 보내줄게!"

그래도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피시방 캡슐보다는 개인 캡슐 하나 마련하는 게 좀 더 좋지 않겠어?


그렇게 해서 캡슐을 사고 게임 홈페이지도 들어가서 회원가입을 하고 로그인을 하고 캡슐 등록을 하고 이것저것 절차를 거쳤다. 생각보다 번거로웠지만 이미 캡슐은 사놓았고 바트는 같이 게임하자며 신났는데 별수 있나, 나는 모든 준비가 끝내고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꽤 신기술이긴 하더라고. 캐릭터 종족 설정부터 외형 커스터마이징이 뭐가 이렇게 많은지 좀 헤매기도 했다. 아무튼 드디어 캐릭터 설정을 끝나니 갑자기 눈앞이 하얘졌다가 어느 한 사람... 아니, 등에 날개가 달렸으니 요정이 나타났다.

"반갑습니다 모험가님. 모험가님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어... 안녕?"
"'안녕'은 이미 등록된 이름이에요. '안녕1850'는 어떠신가요?"
"아냐 내 말은 인사한 거였어! 이름은 코너로 할게."
"죄송해요 '코너'도 이미 등록이 되어있어요."
"음... 콘은?"
"'콘'도 등록이 되어있어요."
"...슈퍼코너는?"
"'슈퍼코너'로 이름을 등록하실 건가요?"
"어어 그래. 그나마 젤 낫다."
"네 슈퍼코너님, 그러면 튜토리얼을 하기 위해 필드를 이동할게요."

처음에는 정신이 없어서 게임 속 이름, 즉 닉네임 짓기만 생각하다 보니 그 요정에 대해 자세히 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잔디가 가득 깔린 장소로 이동을 하고서 햇볕을 등진 그를 보았을 때, 그때 처음으로 요정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정말 요정이었다. 그자의 등에는 마치 페어리처럼 투명하면서도 빛을 받으면 무지갯빛이 은은하게 나타나는 날개가 달려있었다. 키는 나보단 작아 보였지만 날개 때문인지 공중에 떠 있어서 바라보는 시선이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옷은 꼭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입을 것 같은 천으로 둘러싸인 옷을 입었는데 허리에는 붉은 끈이 묶여 있었다. 신발은 맨발에 샌들을 신은 듯한 모습이었는데 나무와 풀 줄기 같은 것들이 얽혀 발목 위까지 휘감아 올라온 듯한 모양이었다. 제일 놀랐던 건 바로 얼굴이었다. 게임 속 ai npc라고는 생각이 안 나는, 정말 실제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는데 필드에서 간간이 부는 바람에 슬쩍 흩날리는 몇 가닥의 검은 머리카락 때문인지, npc 캐릭터라기엔 새파란 눈동자가 또렷하게 코너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요정은 또한 조금 어려 보였는데 17~18살 정도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너무 진짜 사람 같아서 조금 기분이 이상한걸.

"자 그럼 슈퍼코너님,"
"잠깐, 잠깐만! 그런데 혹시 계속 슈퍼코너님이라고 부를 거야?"
"음... 별칭란 설정을 하신다면 저와 그 외 npc들에게서 별칭란 이름으로 부름을 받을 수 있어요."
"그럼 잠시 설정 좀 할 테니까 기다려줄래?"
"네 물론이에요."

상태창을 부르고, 비어있는 별칭란에다가 '코너'를 입력하고 확인을 누르고 껐다. 그리고 다시 요정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코너님, 이제 튜토리얼을 시작해도 될까요?"
"응. 기다려줘서 고마워."
"...뭘요, 모험가님들을 안내하는 게 저의 사명인걸요."

요정은 그리 말하며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푸르게 빛나는 눈이 살짝 휘어진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다. 캐릭터... 맞지? 아니 암튼, 튜토리얼에 집중하자. 빨리 끝내고 바트 만나야지.


그것이 내 첫 번째 요정과의 만남이었다. 튜토리얼을 안내하고, 그게 끝이었다. 그 뒤로 나는 바로 바트랑 만나 파티플레이를 하면서 그 요정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흐려졌다.

그러다가 두 번째 만남이 이어졌다.

"아니 이거 너무 초보에게는 가혹한 거 아니야? 뭘 어째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네. 로그아웃하고 검색하기엔 좀 귀찮은데 게임 속에서 물어볼 데가 없나?"
"응? 어이 거기 모험가님! 자네 이 대륙에 새로 온 모험가라면 적극적으로 요정을 불러보라고. 그들은 이 대륙에 갓 상륙한 모험가님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으니까 말이야."
"어... 고마워요 한스씨."
"허허 고마우면 대장간에 와서 자네 무기 강화나 한번 해주고 가라고!"

두 번째 만남은 자신의 혼잣말을 들은 대장간 npc가 조언을 해준 것에서 비롯되었다. 아마 조언으로 가장했지만 사실 이렇게 플레이어가 도움을 구하는 말을 하고 있으면 안내해주는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뭐 나로선 이렇게 게임에서 안내해주면 나쁘진 않으니까. 그래도 사람 많은 광장에서 허공에 대고 요정을 부르기에는 조금 부끄러우니 사람이 적은 사냥터 필드로 자리를 옮기고 요정을 불러보았다.

"...요정님?"
"오랜만이에요 코너님. 절 부르셨나요?"

허공에서 포탈이 열리더니 그 속에서 튜토리얼 때 보았던 요정이 나타나는 모습은 조금 신기해 보였다. 그냥 뿅 나타나도 될 텐데 포탈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을 취하는구나.

"코너님?"
"응, 그... 대장간 한스가 요정님이 모험가... 그러니까 나...? 같은 존재를 도와줄 수 있다고 해서 말이야. 음,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어."

코너 너란 놈은 이제 하다못해 ai 앞에서도 이런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야?

"아 물론 도와줄 수 있지요. 물어봐 주세요."

요정은 그리 말하며 날개를 두어 번 살랑였다. 진짜... 아무리 봐도 진짜 사람 같아. 비록 아직 게임 속 세상을 많이 돌아다녀 보진 못했지만 그동안 만난 npc들은 그래도 프로그래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고리즘이 좀 보였는데 이 요정은 어떻게 이리 자연스러울 수 있지? 얼른 물어보라는 듯한 표정의 얼굴도 그렇고 너무... 사람 같았다.

"그럼 말이야 이거는 어떻게......~"
"그건 이렇게 하시면 돼요. ~......이렇게요."
"아 알겠다. ~...이렇게?"
"네. 바로 이해하시네요."
"고마워."
"뭘요. 또 물어보실 것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요정은 옅게 웃으며 포탈을 열고 바로 몸을 그 안쪽으로 이동했다. 난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잠시만! 있잖아 또 널 부르려면 그때도 그냥 요정님이라고만 불러?"

요정은 포탈 쪽으로 향한 몸을 돌리고 얼굴을 밖으로 빼고 날 쳐다봤다. 살짝 숙인 고개에 머리카락이 조금 흔들린 모습이 보였다. 새파란 눈이 날 쳐다보았다.

"네 그렇게 불러도 절 불렀다는 건 인지하니까 괜찮아요."
"그렇지만... 뭔가 요정님, 하고 부르는 건 내게 있어선 조금 느낌이 묘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만약 이름이 있다면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서 말이야. 비록 네가 안내 요정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 말을 하자 요정의 얼굴에서 눈 깜빡임이 좀 늘어난 게 보였다. 입을 잠시 꾹 다물고 있는 모습에서 무언가 생각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튜토리얼 안내 ai 요정 npc... 시골 마을 대장간 npc도 한스란 이름이 있으니 그도 이름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물어봤는데 튜토리얼 npc는 없는 건가? 그렇지만 내가 본 캐릭터 중에서 제일 사람 같았는데.

"팀."

"뭐? 미안해, 잘 못 들었어."

처음에는 작게 속삭이듯 말해서 잘 안 들렸다. 그는 입을 다시 다물다가 열었다.

"팀. 팀이라고 부르시면 제가 찾아갈게요."
"팀... 깔끔한 이름이네. 알려줘서 고마워 팀. 그러면 나중에 궁금한 거 있으면 부를게."
"네 코너님. 불러주시면 언제나 나타날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는 이번에는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재빠르게 포탈 속으로 들어갔다. 포탈은 바로 닫혔고 빈 사냥터에는 이제 자신만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요정, 팀과의 두 번째 만남이 끝났다.


세 번째 만남부터는 팀과의 만남이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나는 적극적으로 팀과 만났다. 가끔은 심심하면 팀을 불러서 사냥하면서 그와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팀 너는 그러면 새 모험가를 안내하지 않을 땐 뭐 하고 지내?"
"아무도 절 찾지 않을 땐 자고 있는 편이에요."
"잔다고? 요정이 자는 건 또 어떠려나."
"그냥 무의식 상태라서... 크게 다를 건 없어요."
"그래? 그래도 한번 보고 싶다. 잘 때도 날면서 자?"
"네? 코너님, 새들도 잘 때는 날갯짓을 하지 않잖아요."
"그렇긴 하지... 잠자리도 잘 때는 날개를 가만히 놔두더라."
"저를 지금 잠자리에 비유하신 건가요?"
"아니, 그, 아냐!"
"실망이네요."
"미안해."
"됐어요. 장난이에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 팀과 대화하는 건 은근히 재밌었다. 주로 내가 항상 질문하고 팀은 그걸 대답하는 식으로 대화가 이루어졌는데 종종 대화하다 보면 팀이 확실히 실제 사람과는 다르구나, 하고 느끼는 점들을 찾기도 하였다.

"팀. 네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뭐야?"
"음식이요? 어... 죄송해요. 이거는 제가 답해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대신 대륙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소개해드릴 수 있어요."
"대륙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는 건 능력치 효과가 제일 좋은 음식이라는 건가?"
"모험가님 입장에서는 그렇게 표현되기도 해요."
"안 알려줘도 괜찮아. 난 그냥 네가 음식도 먹나 궁금했거든. 사실 요정이니까 막 전 이슬을 먹고 살아요~ 라고 답하나 궁금하기도 했어."
"그건 아니에요... 왠지 모르겠지만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서는 제게는, 음,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팀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눈썹이 살짝 밑으로 찌푸려져 있고 파란 눈동자는 약간 탁해지는 것이 꼭 수심에 찬 느낌을 주었다. 눈동자 색이 실제로 달라진 건지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는 구별이 잘 안 되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깊게 생각했다가 얼굴 주름 생길라. 너무 찡그리지 마."

그리 말하며 나는 팀의 미간에 검지를 톡 갖다 대었다. 그건 그러니까 바트에게도 가끔 하는 친구끼리의 프렌드쉽 스킨쉽의 의미에서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검지에서 느껴진 팀의 보드라운 피부 느낌에 난 놀라서 손을 바로 떼었다.

"헉 미안.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가버렸어. 괜찮아?"
"네... 음, 남에게 얼굴을 터치 당한 건 처음이지만요."

팀은 그리 말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아까 내가 터치한 미간에 가져다 대었다. 그곳을 살짝 쓰다듬더니 이내 손을 밑으로 내리곤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코너님은 참 재밌는 것 같아요."

그리 말하며 씩 웃는 게 아닌가.

......큰일이야. 나 팀이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기 시작한 거 같아.


그래서... 처음에 말했듯 이렇게 되었다는 거다. 아무튼 마계의 숲이라고? 알이 달린 빛나는 나무? 상상이 잘 안 가지만 흥미는 생긴다. 무슨 알일지 궁금한데 알고 보니 마족의 알이라던가 하면... 윽, 갑자기 상상하기 싫어졌어.

"코너님 표정이 좀 안 좋아 보이는걸요."
"나무에 달린 알이 무슨 알일까 생각해보다가 좀 이상한 생각을 해서 말이야. 혹시 그 알이 막 마족의 알이라던가 그런 거야?"
"잘 알고 계시네요?"
"오 이런. 설마 거기서 알 찢고 마족이 나와서 리젠 돼?"
"리젠? 태어나는 것을 뜻하는 거면 맞아요. 그래서 거기가 코너님의 레벨을 올리기엔 최적의 장소인 거예요."

아니 이런, 지금까지 경험한 게임 그래픽을 생각해보았을 때 결코 좋은 비주얼은 아니겠어.

"으... 그래. 빨리 레벨업 해서 요정의 숲도 가고 싶으니까 어쩔 수 없지."
"요정의 숲... 그렇게 기대하지는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왜?"
"글쎄, 보시면 알아요."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곧 현재 있는 사냥터에서 벗어나 대륙 열차 구간에 진입할 예정이었다. 이곳에서 마계의 숲까지 뚜벅이로 가기에는 거리가 꽤 멀었기 때문이었다. 열차 플랫폼에 진입하면 다른 유저들과 npc가 있어서 지금처럼 팀과 자유롭게 대화하지는 못할 터였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혼자서 떠들고 대화하는 내 모습을 본다면 귓속말로 대화한다든가 하겠지, 하고 알아서 이해하고 납득하겠지만 문제는 말하는 것 말고 시선의 움직임도 보인다는 거니까. 귓속말로 대화하는 것과 실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는 건 두 모습을 비교해보았을 때 은근히 큰 차이가 났다. 그리고 사람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정작 옆에는 아무도 없다? 음...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야, 확실히. 그리고 이 게임에서는 투명인간 물약 같은 건 사냥터, 던전만 가능하고 플랫폼과 같이 유저와 npc들이 있는 게임 속 공공장소에서는 복용이 불가능했다.

"팀. 그런데 왜 너는 다른 유저들에게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야?"
"음, 저는 튜토리얼을 안내하는 개인 안내원이니까요. 사실 그래서 튜토리얼 필드가 아니라 이렇게 대륙 필드를 자유롭게 돌아다녀 본 적은 많이 없어요. 코너님께서 대장간 한스씨의 조언을 받고 절 마을에서 부르셨던 것 기억나나요?"
"물론 기억나지."
"그런 식으로 마을에서도 종종 불리긴 했어요. 그렇지만 마을을 벗어난 모험가들은 보통 절 부르지 않거든요. npc의 조언도 그 마을에서만 나오기도 하고요."
"어 그런 거였어?"
"네. 그곳은 대륙에 처음 온 모험가들을 위한 마을인 만큼 이것저것 모험가님들을 위한 메뉴얼이 아주 많지만, 다른 곳에서는 메뉴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팀의 말은 의외였다. 모험가님들을 위한 메뉴얼이라고? 알고리즘을 말하는 건가. 대장간 한스가 고민하는 플레이어에게 요정을 부르라고 조언해준 것 같은 행동들은 다른 마을에는 없다는 거구나. 그리고 팀은 튜토리얼을 위한 개인 안내원이라서 플레이어 개인에게만 보이도록 되어있다는 것도 좀 신기하네. 하긴 만약 다른 플레이어들의 개인 안내원들이 보인다면 아마 초보자 마을에서는 간혹 유저마다 여러 명의 팀을 볼 수 있겠군. ...그건 좀 이상한걸.

"팀... 이제 와서 물어보는 거지만 넌 나랑 같이 다니는 거 안 바빠? 이 순간에도 새로운 플레이어, 모험가가 대륙에 나타날 때마다 또다른 네가 안내해줄 거 아니야."
"그럴 걱정 하실 필요는 없어요. 어찌 되었든 전 요정이잖아요? 코너님은 그냥, 절 코너님의 개인 요정이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그렇게 말하니까 꼭... 좀 이상하게 들린다. 아무튼 괜찮다는 거지?"
"그럼요. 아 이제 열차 플랫폼에 가까이 왔네요. 어떡하실래요? 이따 마계의 숲에 도착하면 절 다시 부르실래요?"
"그게 좋겠지? 너도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고."
"전 딱히 안 쉬어도 되지만... 그러면 도착하신 후 불러주세요."
"그래. 이따 보자 팀."

팀은 바로 포탈을 부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새삼 느끼지만 저 포탈... 나도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 그렇지만 막상 몸을 안으로 넣으려 해도 막히겠지? 혹은 저 안으로 들어갔다간 바로 버그 걸리고 어쩌면 로그아웃이 안 되어서 캡슐 안에서 평생 살아야 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음. 이 게임을 권유한 바트가 굉장히 미안해하겠지. 그래 호기심으로라도 들어가지는 말자.

그날 마계의 숲 사냥은 상당히 잘 이루어졌다. 조금 hp가 간당간당해서 위험할 뻔한 적도 있지만 다행히 팀이 내가 몬스터에게 기습당하기 전에 뒤를 돌아보라고 말해줘서 하마터면 부활하고서 경험치가 깎일 뻔한 상황을 무사히 모면할 수 있었다. 그날 팀은 답지 않게 내게 잔소리를 조금 했다. 너무 자신에게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만약 혼자 사냥을 왔다면 분명 1번 이상 죽었을 거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죽어도 다시 부활할 수 있고 부활해도 경험치 조금 깎이는 거 말고는 큰 패널티는 없는걸. 물론 그 경험치가 아깝긴 하지만 말이야.

"괜찮아. 뭐 실제로 죽는 것도 아닌걸."
"......그렇죠. 코너님 같은 모험가들은 불사 시잖아요. 그렇죠?"
"어, 그렇지?"
"알았어요. 그만 말할게요. 그래도 이건 명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언젠가 코너님은 혼자서 게임을 하실 거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초반에 사냥 습관을 잘못 들이면 나중에 혼자 사냥할 때 한동안 적응 못 하실 거라는 거요."
"알았어 알았어. 근데 난 만렙 찍어도 계속 너랑 만날 건데?"

나는 장비 칸을 켜놓고 내구도를 확인하면서 그리 말했었다. 확실히 렙이 높은 사냥터라 내구도가 이전 필드보다는 빠르게 닳는 게 잘 보이네. 그렇게 모든 장비 내구도를 확인할 때쯤, 난 팀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는 걸 알아챘다.

"팀?"
"그, 아무튼 보스전에서는 전 함께 할 수 없잖아요."
"아 그렇긴 하지. 뭐 그래도 말이야."
"후...... 정말인지. 제가 이렇게 반응하게 만드는 코너님도 참 대단한 모험가네요, 정말."
"음 진심이야?"
"진심처럼 들리신다면, 그런 거겠지요?"

팀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래, 팀과 이야기하며 또 새롭게 알게 된 점이 있는데 팀은 은근히 시니컬한 구석이 있었다. 비꼬는 말투도 꽤나 잘하고 말이야. 아니, 누가 알았겠어. 게임 튜토리얼 안내 ai 요정 npc가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팀을 프로그래밍한 개발자나 나처럼 깊게 대화한 사람 아니면 솔직히 모를 거다. 새삼 느끼지만......

"코너님, 또 무슨 생각을 그리 하셔요?"
"팀."
"네?"
"너 근데 그냥 이쯤 되면 나한테 반말하면 안 돼? 계속 존대말하는 것도 은근히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부담이라뇨. 제게 그런 건 없어요. 그리고, 안 돼요. 전 모든 모험가님에게 정중히 대할 사명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정중히 대한다라... 흠."

그래, 호감도에 따라서 존대가 반말로 바뀌는 그런 시스템은 아무래도 미연시에서나 있는 거겠지. 혹은 게임의 주요 스토리 npc에서나 말이야. 그래도 팀이랑은 좀더 편하게 대화하고 싶었는데.

"알았어. 그래도 내겐 편하게 대해줘 팀."
"물론이에요. 코너님도 언제나 절 편히 대해주세요."
"그래. 넌 내 요정이니까 말이야, 그렇지?"

여느 때처럼 나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팀에게 대답했다. 그리고 팀은,

"흠, 맞아요. 전 당신의 요정이죠."

라고 말하곤 웃으며 날개를 사르르 흔들었다. 그 모습에 나는 순간 멍을 때렸다. 뭣... 새삼스럽지만 왜 웃을 때 이렇게 예쁜 거야. 아니, 정신차려 코너! 팀과 나는 친구 사이야! 그리고 팀은... 게임 캐릭터라고. 그것도 원래는 튜토리얼용으로 만들어진... ai.

"코너님, 그럼 오늘의 사냥은 끝난 건가요?"
"응 곧 로그아웃 하려고. 잘 가, 팀."
"네. 안녕히 가세요 코너님."
"다음에 또 만나자."
"물론이에요. 언제나 불러주시면 갈게요."

나는 팀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팀도 내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곧 포탈 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그나저나 다음에 또 만나자는 말은 이번에도 없네.

수많은 팀과의 만남을 가졌지만, 언제나 다음에 또 만나자는 말을 꺼내도 팀에게선 '네 다음에 또 만나요' 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 말에 가볍게 긍정은 하지만 그는 언제나 '불러주시면 갈게요'라고만 하지 스스로 또 만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것도 프로그래밍된 알고리즘 때문인 걸까?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새삼 기분이 이상했다. 팀과 함께하는 시간은 즐겁지만, 그와 헤어지고 나서 그가 결국 현실세계에서 숨시며 살아있지 않는, 단지 0과 1로 이루어진 게임 속 ai라는 사실을 다시 자각하는 시간은 썩 즐겁지 않았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약 3개월간의 여름방학은 슬슬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다시 개강이라니. 개강을 하면... 게임할 시간이 이제 적어질 텐데.

"바트 너 그 겜 언제부터 시작했어?"
"나? 지난 학기 기말고사 시즌 때!"
"뭐? 잠만, 진짜야?"
"공부만 하는 게 너무 싫어서... 주말에 조금만 놀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은근히 재밌더라고! 결국 주말 내내 공부 못 해가지고 평일에는 안 들어가고 주말에 쌓인 분량에 평일 분량까지 공부했었지. 휴 생각해보면 정말 미친 짓이었어."
"아 너는 원래도 게임캡슐을 가지고 있었지."
"내가 게임기에 워낙 관심이 많으니까. 그나저나 코너 너 게임 진짜 열심히 하더라? 무슨 내가 들어갈 때마다 있던 것 같던데?"

바트는 그렇게 말하며 감자튀김 하나를 집어 소스에 찍고 입으로 넣었다. 난 입안에 있던 햄버거를 다 씹어 삼키고 이어 대답했다.

"그냥 너랑 나랑 게임하는 시간대가 겹치니까 그런 거지. 막 하루종일 있지는 않았어."
"그래? 그럼 다행이고. 솔직히 내가 추천한 거긴 한데 그렇다고 나는 내 친구를 24시간 내내 게임 속에서 살아가는 중독자로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니라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하하!"
"바트... 기말고사 시즌에 게임 시작한 너보다는 아직 내가 더 자제력이 있는 거 같은데."
"에이 나 그래서 평일에는 게임 접속 안 했다니까?"

바트와 나는 서로 시시덕거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수강 신청은 뭘로 할 거냐, 요즘 진짜 덥다, 햄버거 신메뉴 맛있네 등등 얘기하던 중 나는 잊고 있다가 순간 떠오른 걸 물어보았다.

"너 튜토리얼 때 나온 ai, 그러니까 안내 npc 기억나?"
"응? 튜토리얼 npc? 아니.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 안 나는데."
"요정이었잖아. 검은 머리에 파란 눈, 약간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나오는 의상 같은 거 입고 있었고."
"그랬었나? 너 말 들으니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얼굴은 기억이 안 나."
"그래? 잘 모르면 됐어."
"튜토리얼 npc가 왜? 뭐 그때 버그라도 났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걸 바트에게 얘기해도 되려나.

"나 사실 튜토리얼 안내 요정이랑 지금도 대화하거든."
"뭐?"
"어... 그 물어볼 거 있으면 부르는데 그러면 계속 나타나 줘서 많이 알려주다 보니까 초반에 많이 만났는데 그러다 보니까, 음, 어쩌다보니 지금도 종종 불러."

사실 종종은 아니고 게임 접속할 때마다 불러서 만나지만, 어차피 바트는 알 수 없으니까.

"와우 dude. 정말 신박한 게임 플레이인걸. 난 튜토리얼 npc를 튜토리얼이 아닌 곳에서 만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네."
"그래? 흠, 일반적인 건 아니긴 하지."
"불러서 뭐 해? 그래봤자 npc잖아. 그냥 QnA로 쓰는 거야?"
"아니... 음... 모르는 거 물어보기도 하는데... 사실 심심하면 대화하기도 하거든."
"대화가 된다고? 일정한 패턴 이후로는 계속 반복되는 거 아니야? 오... 친구야... 앞으론 심심하면 날 불러... 외로운 친구를 위해 어디든 달려가 줄게. 가는 김에 쩔도 해줄게!"
"아니, 야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변명하지 않아도 돼... 내 친구가 인터넷 속에서 사는 친구일 줄은 몰랐는데 흑흑."
"아오 그만 놀려."

괜히 말을 꺼냈다. 빨리 다른 주제로 넘겨야겠어.

바트랑 햄버거집에서 헤어지고서 집에 돌아온 나는 침대에 누워 머리 뒤에 깍지를 끼고 천장을 바라봤다. 그래. 바트 말대로 일반적인 게임 ai npc라면 일반적인 패턴이 있길 마련이지. 이 게임 npc들이 진짜 자연스럽긴 하지만 결국 이야기하는 거 들어보면 문장만 다르지 똑같은 패턴의 내용이고. 그런데 팀은... 팀은 좀 달랐단 말이야. 물론 그도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패턴을 보이긴 하지만... 그렇지만......

이건 중증이야. 이젠 게임 밖에서도 팀을 생각하는 거야?

아 복잡한 생각은 걷어치우고 그냥 게임이나 하자. 즐거우면 됐지. 팀은 그냥 겜친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생각해보면 인터넷에서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도 친구가 되는데 그냥 그거랑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아니 심지어 랜선 만남으로 연인을 만들기도 하는데 게임 속 ai랑 친구 되는 게 오히려 더 안 이상할 걸지도 몰라.

......젠장, 랜선 만남 연애 비유는 왜 떠오른 거야?! 아냐 나는 그냥 팀이랑 친구라고. 팀이 물론 이쁘고 게임 켤 때마다 보고 싶고 그렇지만, 아무튼 친구끼리도 그럴 수 있지. 그래 그리고 무엇보다 팀은 날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도 않을 거야. ...친구라고는 생각하겠지?

"하아."

코너 켄트. 너 진짜 돌았구나.

"오늘은... 들어가지 말자. 그래. 더 나아갔다간 바트 말대로 내가 좀 인터넷 속에서 사는 사람일 수도 있겠어. 스스로 조절해야지."

그렇게 입 밖으로 소리 내며 다짐하자 새삼스럽게 내가 게임에 진심이 되었다는 깨달음이 왔다. 안돼... 슬슬 개강도 다가오니 이제 게임 플레이 평균 시간을 줄여야겠어. 잘됐네, 잘 됐어.


한 이틀 동안 게임에 들어가질 않았다. 그러니까, 오늘 로그인하는 건 지난 게임 접속 시간으로부터 3일 이후인 거였다. 그리고 오늘은 답지 않게 오후가 아닌 오전에 게임에 들어가기도 했다. 슬슬 요정의 숲에 들어가도 되는 레벨에 다가왔는데 오늘 오전에 사냥 많이 해서 레벨업 하고 오후에 요정의 숲에 들어가 봐야겠다고 계획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틀 동안 못 온 만큼 조금 더 사냥하는 거지. 아무튼, 나는 이제는 없으면 허전한 파트너 요정, 팀을 불렀다.

"팀. 나 왔어."

......뭐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렸었나?

"팀? 팀! 나야 나. 코너. 정확한 닉네임은 슈퍼코너. 내 말 들려?"

하지만 허공을 360도 돌려보아도 어느 곳에서도 포탈은 생성되지 않았다. 왜... 왜 안 나오지? 내가 레벨이 너무 올라서? 어느 정도 레벨에 올라가면 튜토리얼 요정을 못 부르는 거야? 그렇지만, 팀이랑 이야기했을 때 못 부른다고는 말한 적 없었는데. 그리고 언제나 부른다면 나타난다고 이야기해주었는데. 내... 개인 요정이라면서.

"팀......"
"코너님!"
"팀?"
"응답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 저 여기 있어요. 도착했어요."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난 포탈에서 팀이 등장했다. 겉모습을 봐서는 그냥 다른 때처럼 똑같이 차분해 보이고 흐트러지지 않은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점은 오직 얼굴이었다. 살짝 내려간 눈썹, 조금 더 흔들리는 눈동자. 꾹 다문 입술. 난처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응답이 되질 않았어요. 코너님께서 제 이름을 부르는 걸 인지는 했는데, 포탈이 잘 안 열려서요."
"그렇구나... 그래도 다행히 나중에 열려서 다행이다. 난 레벨업을 많이 해서 더는 널 못 부르는 줄 알았어."
"그건 아니에요."
"저번에 네가 요정의 숲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도 생각이 나서. 그래서 요정의 숲에 갈 때쯤이면 이제 요정인 널 못 보는 건가? 싶어서... 그런 생각도 들었고."
"아니에요."
"응, 알겠어."

팀은 자신의 말에 즉답적으로 반응했다. 잠시 팀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는 살짝 눈을 밑으로 내리더니 이윽고 내게 눈을 마주치고 가까이 다가왔다. 어?

"코너님."
"팀? 이렇게 가까이 와서 보는 건 처음이네. 왜?"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어, 그래? 혹시 이유를 물어도 될까?"
"저는 코너님을 더 오래 만나고 싶으니까요. 나중에 저를 6시 이후에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당분간은 그래야 할 것 같아요."
"6시 이후에, 알았어. 그런데... 왜? 혹시 이건 말할 수 없는 부분이야?"
"......말할 수 없습니다. 죄송해요."
"아니야, 어쩔 수 없는 거 알아. 사실 너가 날 더 오래 만나고 싶다고 직접적으로 얘기해주어서 좀 기쁘고, 하하."

젠장, 코너 켄트 너 진짜 무슨 수작 거는 것 같아. 하하? 이 인위적인 웃음 진심이야?

"저는 언제나 코너님과 함께 한 시간들이 즐거웠는걸요. 그럼 죄송하지만 다시 돌아가 볼게요. 즐거운 모험 되세요."
"응 그래. 또 보자 팀."
"네."

내 앞에 서서 날 바라보던 팀은 다시 공중으로 올라가더니 포탈을 열고 바로 들어갔다. 그 모습은 어딘가 조급해 보였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시스템에 버그라도 난 걸까? 오랫동안 만나고 싶어서. 6시 이후에 부르라고. 게임 시스템에 업데이트라도 해서 그런 건가? 대규모 패치가 예정되어 있다던가? 그렇지만, 음. 모르겠다.

그날은 팀 없이 혼자서 사냥을 했다. 조금 심심했지만 결국 요정의 숲에 들어가도 되는 레벨까지 올렸고, 그리고.

"......나중에 같이 들어가는 게 좋겠지?"

요정의 숲 근처까지 가놓고 게임을 로그아웃했다.

그날 이후 난 팀의 말대로 그를 6시 이후에 불렀다. 팀은 다시 예전처럼 이름을 부르면 포탈을 열고 나타났다. 가볍게 떠들고 질문하고 가끔은 장난도 치면서 지냈다. 그렇지만, 옛날과는 다른 팀의 모습들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이야 팀 네가 요정의 숲 기대하지 말라고 한 거 이제 이해가 되더라고. 생각보다 텅 비고 아무것도 없던데?"
"그렇죠? 코너님께서 너무 기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크게 실망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지나가는 식으로 말했었던 거예요."
"난 사실 너 같은 요정들이 그곳에 있는 줄 알았어. 요정의 숲 가운데 마을 같은 곳도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요?"
"응, 근데 무슨 흑화한 페어리만 있고... 조금 음산한 느낌도 들더라고."
"이름은 요정의 숲이지만 어찌 되었든 사냥터니까요."

팀은 그 말을 하며 팔짱을 꼈다. 그와 나는 사냥을 끝내고 휴식처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나는 걸어갔지만 팀은 다리는 딱히 움직이지 않고 날갯짓으로 공중에서 움직였다. 사냥을 끝낸 사냥터는 텅 비어 있었다. 몬스터의 사체들은 흔적 없이 소멸해있었고 리젠이 되려면 시간이 좀 더 지나야 했다.

"와 근데 요정의 숲은 아까 음산한 기운이 있다곤 했지만 그래도 나무나 바람이 좀 신선해서 좋다."
"마계와는 달리 지상에 있고,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적인 숲속이니까요."
"이곳에 오는 플레이어, 그러니까 모험가들은 딱히 나무 벌목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몬스터, 페어리만 잡아가기도 하고. 어 저기 봐. 새도 있네?"

눈앞에는 새 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빨간 깃털을 가진 새였는데 내가 새를 손으로 가리키자 내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한 건지 새가 이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설마 새가 몬스터는 아니겠지?"
"아니에요."
"여기로 날아오는데?"
"새는 모험가, 코너님에게 부딪히지 않게 옆으로 빗겨나갈 테니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그 말대로 새는 코너를 향해 날아오다가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 근데 그쪽은 팀이 있는 곳인데.

"!"
"팀!"

그리고 일은 벌어졌다. 새와 팀이 부딪힌 게 아닌가. 팀은 지금까지 보았던 눈 중에서 가장 크게 뜬 눈으로 자신에게 부딪힌 새를 쳐다보았다. 그는 가슴에 부딪힌 새가 떨어지기 전에 재빠르게 손을 밑으로 대어 새를 받들었다. 날갯짓이 아까보다 2배는 더 빨라진 게 심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자연물... 같은 거랑 부딪혀본 적은 처음이지 않아 팀?"
"......"
"팀?"
"네. 맞아요."

팀의 두 손바닥에 누워있던 새는 곧 몸을 들썩이더니 다시 일어나 자리를 잡고는 날개를 피고 날았다. 나는 금새 멀리 날아간 새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팀을 바라보았다. 팀은 계속 새가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거야?"
"아뇨... 이런 적은 저도 처음이라서. 놀랐어요."
"나도 놀랐어. 앞으론 사냥터에서는 조금 조심해야겠다."
"그러게, 요."

팀은 여전히 이제는 사라진 새의 경로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는 나를 향하지 않는 파란 눈동자를 쳐다보았지만 미동 없는 그 눈동자를 보면서 오히려 아, 이런 면은 결국 어쩔 수 없는 그래픽이구나 하는 생각만 늘 뿐이었다. 실제 사람들 사이처럼 눈빛으로 생각을 추측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항상 팀의 눈빛은 물론 새파랗고 맑고 청량한 느낌이었지만... 전혀 속마음을 눈치챌 수 없고 왠지 모르게 위화감과 공허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코너님."
"응?"
"저, 가야, 겠어요."
"응, 알았어. 괜찮아? 목소리가 좀 끊기는 것 같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푹 쉬다 오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무튼 잠이라도 푹 자둬."
"네. 걱정해주는 거죠? 고마워요."
"또 보자 팀. 나중에 다시 부를게."
"언제나. 부르신다면 찾아갈게요, 코너님."

언제나처럼 손을 흔드는 굿바이 인사를 하며 팀과 나는 헤어졌다. 팀 없이는 심심한데, 로그아웃이나 할까. 나는 게임을 끄고 캡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상황은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하여간 그 녀석 말로는... 팀? 내 말 들려?"
"......"
"팀."
"아. 엇 네 코너님. 듣고 있어요."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먼저 팀의 반응 속도가 아주 느려졌다. 가끔은 움직임도 느려지기도 했다. 특히 사냥터같이 주변 몬스터, 즉 결국 하나의 프로그래밍이 된 알고리즘 결정체들이 많을수록 더더욱 느려지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앞으로 사냥을 먼저 하고서 팀을 부르고 그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 저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오늘은 좀 짧게 만났는데 아쉽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지?"
"그럼요. 불러주신다면 언제든. 안녕히 계세요."
"다음에 또 보자 팀."

팀은 빠르게 포탈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항상 하던 손 인사를 하기에는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나는 포탈이 사라지고서 흔들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래, 두 번째 변화는 바로 팀이 어느 순간 가야 한다고 말하며 사라지는 상황이 급격히 늘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왜 가야 하는 걸까? 플레이어별 튜토리얼 개인 안내 ai npc기 때문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들의 안내원 npc, 즉 팀은 그들 각자에게 말을 건네고 있겠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초반에 팀과 이야기했을 때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문제가 생겼다는 건가? 무엇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래도. 그래도 괜찮았다. 팀과 계속 만나서 대화할 수 있다면.

"코너님......"

그렇지만, 더는 못 만난다면.

"팀. 가야 하는 거야?"
"네. 이게 참, 말해주고 싶은, 싶은데."
"괜찮아. 얼른 가 봐."
"......저."
"사과는 하지 말고."

그날 팀은 이례적으로 가야 하는 상황에서 곧바로 포탈을 열고 사라지기보다는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눈을 밑으로 내리고 시선을 나와 마주치지 않던 팀은 눈을 질끈 감더니 재빠르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코너님, 용서하세요."
"뭘,"

그러고는 팀은 처음으로 날갯짓을 멈추고 땅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발을 움직이며 걸어 내 코앞까지 온 팀은.

"팀...?"

말없이 나를 꽉 안았다.

너무 놀랐던 나머지 난 잠시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재빠르게 나 역시 허공에 있는 팔을 그의 허리로 향하여 팀을 안았다.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기에 허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코 밑으로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과 아주, 아주 미세하게 떠는 투명한 날개를 나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팀과 나, 둘 다 아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긴 것 같이 느껴졌던, 그러나 실은 매우 짧았던 시간이 지나고 먼저 말을 꺼낸 건 팀이었다. 팀은 여전히 날 안고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보고 싶을 거예요."

왜 그런 말을 꺼내는 걸까?

"나도."

그리고 나는 그걸, 왜 그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코너님... 코너...님."
"응."
"코너."
"그래, 팀. 내 이름은 코너야. 그리고 그건 내 진짜, 이름이기도 하고."

팀은 여전히 날 안고 있었다. 거의 매달리다시피 나를 꽉 붙들어 맸다.

"코너.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때는."

팀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친 그 푸른 눈동자를 보며. 옛날에는 볼 수 없었던, 살아있는, 분명히 생기가 넘치는 눈빛을 보며. 내 입에서는 의식하지 않은 채 말이 흘러나왔다.

"응 팀. 꼭, 다시 부를게. 언제나 또 부를게. 다시 만나자."
"...그래. 부른다면 언제나... 찾아갈게. 갈 수만 있다면 꼭."
"그리고. 그리고... 네가 올 수 없어도. 그렇다면 네가 날 부르면, 이번에는 내가 찾아갈게."
"뭐? 하하, 코너... 그래. 좋아."
"항상 내가 부르면 네가 찾아왔으니까. 이제는 내 요정이 부르면 내가 찾아갈 때도 됐다고 봐."
"그런 걸까? 비록 말뿐이지만 기분은 좋네."
"진짜로... 찾을 거니까."

팀은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볼 뿐이었다.

계속해서 울리는 긴급 시스템 점검 알림을 무시하고, 나는 팀에게 말했다.

"팀. 만약 다시 널 만날 수 없다면, 그러면 계속 튜토리얼을 새로 시작해서라도."
"코너. 넌 계속해서 모험을 해야지."
"그렇지만......"
"인연이 된다면, 만날 순 있을 거야."
"정말로?"
"응, 비록 내가 널 못 알아볼 것 같지만. 그리고 그건... 정확히 내가 아니기도 하고."
"무슨... 소리야?"
"이해 못 하는 게 당연하니까 괜찮아 코너. 그냥, 그냥... 혼잣말이었어. 아 시간이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이 아까운 시간을 혼잣말로 보내는 건 조금 낭비였을지도."
"아니야, 더 말해줘. 네 목소리 더 듣고 싶어."

시스템은 계속해서 경고한다. 외부에 의한 강제 로그아웃은 잘못했다간 렉이 일어날 수 있고 경고한 만큼 회사에서는 책임지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 로그아웃하기를 매우 권장한다고 상태창이 뜬다. 됐어, 꺼져 상태창. 난 캐릭터에 버그가 일어나도 상관없어.

"코너...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난 너랑 오래 함께 있고 싶었어."
"응."
"그런데 말이야. 나는 내 사명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위에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봐."
"위?"
"날 만들어낸 이 세상의 신 중 한 명이라고 하면 이해할까?"
"신? 아 대충 이해했어."

그러니까 게임 개발자 같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아무튼 음. 내 움직임에 대해서 그가 기록을 확인한 것 같아. 그래서 되도록 그들이 정규적으로 보지 않는 6시 이후부터 만나자고 했지만... 결국 이렇게 됐네."
"그렇구나......"
"코너. 난 너 같은 모험가들, 그래 네가 말하기로는 플레이어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알아. 그리고 말이야... 사실 좀 부러웠어."
"그랬었어? 하지만 넌 내게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는걸."
"당연하지, 너랑 함께 하는 시간은 부럽다는 감정을 배우기보다는 즐겁다는 감정을 배우는 데 사용되었는걸."

시스템 경고음을 뒤로하고, 나는 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점점 소리가 작아져 가는, 그렇지만 여전히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와 어울리면서 많은 걸 발전시킨 것 같아. 날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심어둔 창조주가, 이제 와서 이걸 가져가려는 것도 좀 웃기네, 하."
"팀."
"즐거웠어. 그리고... 코너."
"응."
"또 만나자."

...드디어 이 소리를 듣네.


[강제 로그아웃 되었습니다.]


게임 긴급 패치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언제 끝나나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포럼에 가보니 유저들은 뜬금없는 긴급 패치가 길어지는 것에 다들 화가 난 모습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심각한 버그도 없었고 게임 시스템적으로 문제도 보이지 않았고, 게임 속 밸런스 문제도 없었다고 한다. 단지, 갑자기 아무런 이유 설명 없이 긴급 패치가 진행된다고 통보해놓고 바로 내쫓고는 이틀째 패치를 진행 중이라는 거였다.

하지만 난 왜 때문인지 알 것 같았다.

3일째 되는 날, 패치가 끝났고 패치 노트에는 자잘한 버그들 외에 유저들이 원했던 기능 추가, 몬스터 추가 등등 뜬금없지만 유저에게는 좋은 패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코너는 그 많은 상향 패치들을 대충 넘기고선 밑에 달랑 적혀있는 한 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튜토리얼 npc에서 나타난 사소한 결함 패치'

그렇구나.

"사소한... 결함."

두려웠다. 로그인하고 팀을 부른다면. 나타날까? 아니면 이젠 더는 나타나지 않을까. 나타나도, 나를 기억할까? 이전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상상이 끝이 나지 않는 두려움에 패치 당일은 게임을 들어가지 못했다. 그다음 날에는 약속이 있어 로그인하지 못했다. 셋째 날에는... 그냥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서 나는 결국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로그인을 하고. 그날 팀과 헤어졌던 필드의 정경을 둘러다 보다가.

"팀."

그를 불렀지만.

"......"

아무런 대답도, 아무런 이상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처음에는 팀의 말대로 계속해서 모험, 즉 게임 플레이를 해나갔다. 그렇지만 금방 질려버렸다. 목표도, 같이 사냥하는 친구도 없이 혼자서 게임을 하는 건 재미없었다. 심지어 바트도 게임을 접었다고 한다. 자기 말로는 요즘은 레이싱 게임이 또 끌린다면서 이제 알피지는 질려서 한동안 안 할 거란다.

팀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팀은 하지 말라곤 했지만 게임 캐릭터를 하나 새로 만들었다. 그때 이야기했을 때 인연이 있다면 분명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했으니까. 물론 그때 만난다면 팀은 날 못 알아볼 거라고 했지만. 그리고 어쩌면 그건 더는 그때의 팀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존재하고 있는지라도 궁금했다. 그렇게 아주 작은 희망을 품고 지난 캐릭터 외형과 별 차이 없이 커스터마이징을 했다. 사실 그 커스터마이징도 현실의 내 얼굴에서 달라진 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순 없겠지만 만약 두 캐릭터가 같이 서 있다면 쌍둥이 캐릭터라고 누군가는 착각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혹시라도 팀이 날 기억할까 봐 외형을 다르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튜토리얼에 들어갔지만......

[반갑습니다 모험가님. 모험가님의 이름을 입력해주세요.]
"팀?"
['팀'은 이미 있는 이름입니다. 다른 이름을 입력해주세요.]
"팀 너야? 모습은 안 보이지만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거야?"
[이름에는 특수기호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제발..."
['제발'은 이미 있는 이름입니다. 다른 이름을 입력해주세요.]
"......슈퍼코너1850."
['슈퍼코너1850'으로 이름을 등록하실 건가요?]
"그래."
[반갑습니다 '슈퍼코너1850'님. 튜토리얼을 위해 필드를 이동하겠습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필드의 허공에는 알고리즘에 의해 정해진 답변만을 말해주는 네모난 시스템 상태창만이 존재했다.

"어째서......"
[첫 번째 튜토리얼, 몸의 싱크를 맞추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왜... 없는 거야?"
[왼발을 들어 앞으로 이동해보세요.]
"팀, 팀 내 말 들려? 시스템, 너 누구야? 혹시 팀이야?"
[왼발을 들어 앞으로 이동해보세요.]
"젠장... 정말 바보 같다, 나. 지금 뭐 하는 짓거리인지."
[왼발을 들어 앞으로 이동해보세요.]
"됐어, 로그아웃."



그 이후로는 절대 캡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결국 대학은 개강을 하였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곧 끝없는 과제들이 몰려왔고 딱히 모범생은 아니었던 난 겨우겨우 과제를 제출하면서 점점 게임을 잊고 바쁜 현실을 살아갔다.


햇볕이 상당히 쨍한 날이었다. 가을 햇볕이 또 은근히 따갑다고 했는데 정말인 것 같았다. 그날은 과제와 관련하여 모임이 있어 여러 회사들의 높은 빌딩들이 둘러싼 거리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자칫하다간 늦을 것 같아서 나는 되도록 사람들이 별로 돌아다니지 않는 넓은 보도에서 뛰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온 힘을 다해 달려가던 중, 갑자기 카페 문을 열고 뛰어나오는 사람을 보고 순간 놀라서 몸을 멈추려고 했다. 그렇지만, 사람이 장난감 자동차도 아니고 멈추라고 신호를 보내도 갑자기 멈추지는 않는 법이다. 나는 결국 그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멈추려고 했는데 다리가 꼬여버리고 말았어요. 괜찮으신가요?"

바닥에 부딪힌 엉덩이가 아팠지만 재빠르게 일어나고 부딪힌 사람에게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그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오, 이런.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고 나왔군... 바닥에 커피가 엎질러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사람의 옷이랑 가방에 커피가 튀지 않았다는 거려나. 커피값을 줘야겠네. 우선 일으켜 세워 드리자. 나는 그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실 수 있으신가요? 죄송합니다. 커피값은 제가 물어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손만 끈적거리는 것 빼고는 다행히 서류 가방이나 옷에 튀기지도 않았고... 저도 카페에서 뛰어나왔던걸요. 저야말로 카페에서 나가기 전에 주위를 둘러봤어야 했어요."
"...팀?"
"네?"

내밀은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 그자의 파란 눈을 본 순간, 처음 든 생각은 팀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팀이랑 완전히 똑같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팀이 나이를 먹었다면 꼭 이러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 같았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제 친구랑 얼굴이 너무 똑같으셔서."
"흠... 친구 이름이 팀인가요?"

고개를 까닥이는 것마저도 똑같아.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어떻게... 어떻게......

'날 만들어낸 이 세상의 신 중 한 명이라고 하면 이해할까?'

너무나 똑같은 얼굴을 보며 나는 내 요정, 팀이 마지막 날 이야기해준 그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지? 어쩌면 이 사람은 게임 모델인 걸까?

"네. 제 친구 이름이 팀이거든요."
"그거참... 우연이네요. 저도 팀이거든요. 정확한 풀네임은 따로 있지만. 그 친구의 풀네임은 무엇인가요?"
"잘... 모르겠어요. 단지 팀이라고만 부르라고 했거든요."
"그래요?"

내 요정과 이름과 얼굴이 똑같은 그자는 가방 속에서 물티슈를 꺼내어 커피에 젖은 손을 닦아내며 말했다. 나는 그자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머리가 복잡해지다 못해 새하얘지는 것 같아, 이만 더 늦지 않으려면 인사를 하고 달려가야 한다는 머릿속 외침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그자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자는 나보다는 키가 더 작았다. 그렇지만 팀보다는 키가 더 컸다. 머리카락은 팀이 조금 더 길었고, 그는 팀보다는 뒷머리를 더 깔끔히 정리한 스타일이었다. 그렇지만 앞의 오 대 오 가르마는 두 명 모두 스타일이 똑같았다. 눈동자는 똑같은 파란 홍채를 가졌다. 차이점이 있다면 눈앞의 그는 조금 더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제 얼굴도 그 친구 팀이랑 똑같이 생겼나요?"
"네?"
"아뇨, 뚫어지게 쳐다보시길래."
"아, 아. 죄송합니다. 정말로... 그 커피값 정말 물어드릴게요. 계좌 보내주시면......"
"괜찮은데... 죄송하지만 저도 시간이 얼마 없어서요. 명함 드릴 테니 나중에 연락해주시겠어요? 보내드릴게요."
"네, 네. 시간 뺏어서 죄송합니다."
"아녜요. 이런 경험도 있는 거지요. 액땜했다고 생각하면 돼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고요."

그는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어 나에게 건넸다. 명함에는 프로필 사진과 회사 이름, 직급, 부서, 이메일, 전화번호 등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얇고 길쭉한 고딕체로 적힌 이름에는, '티모시 드레이크'가 적혀 있었다.

"아... 저는 코너예요. 코너 켄트."
"흠, 네 켄트 씨. 비록 서로 실수로 만났지만, 부디 오늘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라며.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드레이크 씨. 이따... 연락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그와 헤어졌다. 결국 모임에 늦어서 팀원들에게 사과해야 했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팀과 그자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모임을 끝내고 집에 왔는지조차도 모르겠다. 침대에 누워 명함을 앞뒤로 돌리며 멍을 때리다가 명함 앞쪽의 이름에 시선을 고정했다.

"......"

티모시 드레이크. 티모시. 팀.

지금 보니 회사 이름도 익숙하네. 여기... 그 게임 만든 회사잖아. 게임 모델인 줄 알았는데 개발자 같은 거였나? 아니지, 실제 회사 사람들 얼굴로 게임 만들면 딱히 모델 섭외 안 해도 되고 오히려 이득이니까 둘 다 했을 수도 있겠네. 그도 그럴 게 고개를 까닥이는 모션, 아니 모습이 너무 똑같았는걸. 모델인 건 확실한데... 이름도 같고......

'응, 비록 내가 널 못 알아볼 것 같지만. 그리고 그건... 정확히 내가 아니기도 하고.'

뇌리에 스치는 팀의 말에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팀은 알고 있었다.

'인연이 된다면, 만날 순 있을 거야.'
'응, 비록 내가 널 못 알아볼 것 같지만. 그리고 그건... 정확히 내가 아니기도 하고.'
'그런데 말이야. 나는 내 사명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위에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봐.'
'날 만들어낸 이 세상의 신 중 한 명이라고 하면 이해할까?'
'아무튼 음. 내 움직임에 대해서 그가 기록을 확인한 것 같아. 그래서 되도록 그들이 정규적으로 보지 않는 6시 이후부터 만나자고 했지만... 결국 이렇게 됐네.'
'너와 어울리면서 많은 걸 발전시킨 것 같아. 날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심어둔 창조주가, 이제 와서 이걸 가져가려는 것도 좀 웃기네, 하.'


"가져갔구나."

팀이 ai로서 자체적으로 발전하도록 프로그래밍을 해놓고는, 이상한 것 같다고 판단하고 다시 가져간 거구나. 외형도, 성격도, 그냥 팀을 이루는 모든 것을. 그러고서는 튜토리얼 알고리즘만 남겨놓고... 시스템만 남겨놓고 없앴구나.

명함을 쥔 손이 떨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차마 구길 수는 없었다. 연락해야 하니까.

분명 팀을 완전히 삭제하지는 못했을 거야. 다른 곳에 백업해놓기는 했겠지. 그러니까, 팀 ai만 따로 실행해서 대화 한 번이라도 더 나누어볼 수 있다면. 그날 말했던 대로 이번에는 내가 찾아갈 수 있다면.

나는 티모시 드레이크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선은 커피값 입금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스몰토크를 이어나가자. 할 수 있어, 코너. 이번엔 내가 찾아가야지.


<안녕하세요, 드레이크 씨. 오늘 오전에 부딪혔던 코너 켄트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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